Friday, September 14, 2012

임동락(LIM, DONG-LAK)



Lim Dong-Lak
형상(形相)은 이치(理致)를 추구한다.



Richard Vine (Art in America Director)

     올해로 59세인 작가 임동락은 부산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조각과 교수이자, 한국의 주요 문화기관의 어드바이져로 활동중이며, 프랑스 ‘메종 데 아티스트’ (Maison des Artistes)의 일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들은 한낱 부차적이거나 명예로운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인 사유와 같은 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현시대의 의례적인 관심사와 전통적 한국미학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널리 존경받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추상적 조각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두가지 사실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데, 고도의 독창성으로 고안된 기하학적 형태들의 순도() 와 정밀성, 그리고 금속이든 석조든 잘 다듬어진 표면의 매끄러움이 그것이다. Point-Fly (1999)-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상 안에 그것의 중심부 주위가 비틀어진, 원형 면의 스테인레스 스틸작업-와 같은 작품들은 형태에 대한 지각적이고 수리적 (數理的) 인 본질을 탐구한다. 이러한 양식화 안에서 가상적으로 관념적인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탄한, 그래서 완벽하게 매끄러운 외부 안에서 긴장감을 지탱하고 있는 회전우력 (비트는 힘)을 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재 세계 그 자체의 변화와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반짝이는 원반 형상은 우리에게 어떤 독립체를 파악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즉, 하나의 오브제로서 우리의 시각영역 속에서의 어떤 자극적 집단이 그것의 일부인가 아니면 전부인가?
분명한 것은 양감의 확실한 비율에서 표면으로, 또한 표면에서 테두리로,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안에 내재되어있는 미스테리한 무언가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논리 정연한 관계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두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각적인 언어 또한 배우고 타고난다. 형태들 역시, 이 문장안의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만약  질서나 구조,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의미의 논리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면, 무질서한 채로 남겨질 것이다.
    
 어떤 관람자들은 우주에 만연하며 그 경계를 결정짓는, 더욱 더 고차적인 순리성의 실증(實證) 을 위한, 심지어는 (종교적 의미로서) 자연에 대한 침묵의 계시를 위한 내외의 조화를 채택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임동락의 최근 작품들은 하이퍼 모던적인 유토피아적 충동에 입각하고 있다.  능숙하게 조직화된 3차원 그래프의 원자집단처럼 보이는 Point-The gate of Space(2007)과 Point-Various Earthly Game (2007)과 같은 작품들은 극도의 물질적이고 숙련된 복잡성으로부터 시각적인 가해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즉, 미니멀한 형태안에서의 최대한의 개입이다: 특히 아시아에서 이 관점은 이상적인 미에대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컴퓨터로 이러한 작업들을 고안하면서, 그는 때로는 건축적 스케일에서 그것들을 착상한다.- 그는 아름다움 속에 관람자들을 영속적으로 남겨지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예술 안에 가두길 바랬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가  근원적으로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의 진화과정의 변화를 소홀히 하지 않는 듯 하다. 그의 몇몇 이전작품들은 간단하면서도 거칠게 밴드 되었으며 Point-Tension (1981)과 녹슨 강철 작품은 원시 돌 작품처럼 매우 세련된 요소를 내포한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관능적인 문제로부터 지력과 정신의 출현을 전달하기 위해 로댕에 의해 (그리고 그 이전에 미켈란젤로에 의해) 표상적인 형태 안에서 사용된 전략이다. 매끈하게 끝을 잘라버린 듯한, 그것의 다리와도 같은 형태들을 가진 Point-Mass II(1996)와 같은 많은 후작들은, 브랑쿠지 스타일이 암시되어 있다. 끝없는 컬럼 패션 (Endless Column Fashion)과 같은 구성 같이 수직으로 쌓아 올려진 Point-Human+Space (1998)은 여러 비평들에 의해 지속적인 프랙탈 복제와 성장의 언급으로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적 세련미는 대조와의 조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완벽하고 철저히 고안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는, 또한 작품속에 어린아이와 같은 유머를 부여하기도 한다. Point-성장(1999)에서의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뒤틀리고 단단한 나뭇가지, 혹은 Point-Mass(1996)에서 보여진 양식화된 둔부와 음낭을 상기해보라. 현실성에 근거한, 하지만 이지적인 진전과 영적인 승격에 전념한 그는 그의 작업방식을 “중도를 위한 탐색”으로 묘사하였다.

 다수의 그의 작품들은 비록 크고 육중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적으로 이동성을 가진다. 그것들은 어느정도 그들 주변의 환경을 투영시키면서, 그러나 자족적이고 자주적인 성질은 남아있는 채로 어느곳에서나 놓여질수 있다. (어느 평론가들은, 이러한 상황은 빈번하게 재배치된 한 군인의 아들이었던, 따라서 그의 가족들을 매 해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했던 작가의 유년시절을 상기시킨다라고 언급하였다.) 다른 작품들은 질서, 조화 그리고 영원히 지속가능한 상태로서의 미를 제시하면서 ‘환경에 어울림’을 추구한다.  이러한 모든 미래주의적 외관을 위한 ‘환경’ 안에서,  작품들은 매우 전통적인 한국의 사회적 이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작가는 그 외형의 정연함에 내포된 긴장감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의 틀어진 초기의 스틸조각은 팽팽한 활시위같은 케이블로 쏘여진것과 같고  그의 최근작인  “건축적” 조각들은 시각적 대위법과 상호적으로 상쇄하는 양감을 채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모든 작업들은 언뜻 보기에 쉬는 듯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것만 같다. 즉, 정적인 동시에 동적인 셈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조각의 핵심을 존중한다.  모든 조각에 앞서, 그것이 얼마만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이 될 것인지를 떠나, 물활론적인 감각, 즉  큰 덩어리의 돌이나 금속이 살아 있는 듯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고 조각가는 그것을 보존, 향상시키고 또 표출하게 한다. 그의 작업들은 아주 특별한 영적인 정제와 하이테크적인 기교를 전달하는 동안 인간 종족과 땅의 기백을 결합하는 원초적임무로가득차있다.
  


Lim Dong-Lak:
Form Follows Logic

By Richard Vine

Lim Dong-Lak, 59, is a professor of art at Dong-A University in Busan, a member of the Maison des Artistes in France, and an advisor to major cultural organizations in his native Korea. These distinctions are not merely incidental and honorific; rather, they testify that his work, like his critical thinking, represents a widely admired effort to wed up-to-date formal concerns to traditional Korean aesthetics.
     Viewing Lim’s abstract sculptures, one is immediately struck by two things: the purity and precision of the highly inventive geometric forms, and the smoothness of the polished surfaces, be they metal or stone. Works like Point?Fly(1999),acircularplaneofstainlesssteeltwistedarounditscenterintoaMobius-like shape, explore the perceptual and mathematical essence of form. Virtually Platonic in its stylization, the piece is nevertheless endowed with a torque, holding tension within even as its exterior, so flawlessly sleek, reflects the variety and change of the “real” world outside itself.
What is required, this gleaming disk seems to ask, for us to apprehend any entity?which is to say, any set of stimuli?in our visual field as an object, distinct and entire? Certain ratios of volume to surface, and surface to edge, no doubt, but also something mysterious within ourselves that instinctively recognizes those relationships as coherent. Visual language, like verbal language, is both learned and innate: the forms, like the words in this sentence, would remain chaotic if they did not correspond to an order, a structure and logic of meaning, which is already inside us.
Some viewers might take that outer-inner correspondence for proof of a higher rationality pervading and subtending the universe, even (to use a religious vocabulary) for a silent revelation of the nature God. Certainly there is in much of Lim’s recent work a kind of hyper-modern utopian impulse. Pieces such as Point?TheGateofSpace(2000), looking like a deftly orchestrated cluster of three-dimensional graphs, draw visual comprehensibility out of extreme physical and intellectual complexity. Maximum import in minimal form: this is a prime aspect of ideal beauty, especially in Asia. Designing such works in the computer, Lim often conceives them at architectural scale?as though he wished to envelope his viewers in art, to let them dwell perennially within the beautiful.
But, at the same time, Lim never seems to forget where we come from, organically, or to neglect the sheer quirkiness of our evolutionary process. Some of his earlier works are simply bends of rough, rusted steel and some?like Point?Tension (1981) ?juxtapose a highly polished element with raw stone: a strategy used, in figurative form, by Rodin (and before him by Michelangelo) to convey the emergence of soul and intellect from brute matter. Many subsequent works, like Point?MassII(1996)withitsleg-likeformstruncatedandslick,suggestanincreasingallegiancetoBrancusi.Point?Human+Space (1998), a vertical piling up of such components in EndlessColumnfashion,hasbeenreadbyseveralcriticsasareferencetoongoingfractalreplicationandgrowth.
Artistic sophistication, this oeuvre suggests, entails the reconciliation of contraries. The same Lim who creates perfect, highly cogitated forms is not adverse to boyish humor. Consider the wry, determined sprig breaking out of an eggshell in Point?Growth(1999)orthestylizedbuttandscrotumpresentedinPoint?Mass(1996).Rootedinearthinessyetdedicatedtointellectualprogressandspiritualelevation,theartisthasdescribedhisworkingmethodasa“searchforamiddlecourse.”
Many of Lim’s pieces, though large and weighty, are in a sense entirely mobile. They can be placed anywhere, mirroring their environment to some degree, but remaining self-contained, autonomous, resolved. (A condition, some commentators have said, that recalls Lim’s youth as the son of a military man who was frequently redeployed, plunging his family into a new situation each year.) Other works seek to becometheenvironment,proposingorder,harmony,andbeautyasaninfinitelysustainablestate.Inthis,foralltheirfuturisticappearance,theyrecallaverytraditionalKoreansocialideal.
But Lim never forgets the tensions subsumed in that outward orderliness. His early twisted-steel pieces were stung with cables, taut as bowstrings; his most recent “architectural” sculptures employ visual counterpoints and mutually offsetting volumes. Though still, all Lim’s works are still moving?like creatures glimpsed at rest.
Thus Lim honors the core of his chosen art. For preceding all sculpture, no matter how abstract or geometric it may become, is the animistic sensation that great masses of stone and metal have a living presence?a life suffused within?which the sculptor strives to preserve and enhance, to make manifest. Lim’s works fulfill this primitive mission?uniting the earth spirits with the human tribe?while conveying extraordinary spiritual refinement and high-tech finesse.

林  東  洛  LIM, DONG-LAK
홍익 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   재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조각과 교수
         (사)부산 비엔날레 이사
         부산 국제 영화제 자문위원
         한국 현대조각회 고문
         메종 드 아티스트(프랑스)
현    주 소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1436-1번지 더샵 아델리스 102동 4203호
       전화 : (자택)  070-8792-0122   FAX : 051-701-0128  핸드폰 : 010-3850-0137
프랑스 주소 :  6 RUE D'ANKARA 75016, PARIS, FRANCE.
       전화 : (33).01.4503.2675        핸드폰 : (33).06.2425.8098
       E-Mail:  limdonglak@gmail.com   Home Page: www.limdonglak.com

중요 작품 경력
-- 개인전--
1984 11월20일-11월26일  제 1회 개인전 (가나화랑 초대, 서울)
1988  9월               제 2회 개인전 (서울 아트페어, 예원화랑 초대)
1989 11월11일-11월20일  제 3회 환경 조각전 (신라호텔, 가나화랑 초대)
1994  5월30일- 6월 4일  제 4회 개인전 (무라마쯔화랑, 일본 동경)
1994  9월20일- 9월25일  제 5회 개인전 (BENY 갤러리 초대, 일본 경도)
1996  6월11일- 6월21일  제 6회 개인전 (공간화랑 초대, 부산)
1996  6월11일- 7월11일  제 7회 인터넷 개인전 (http://www.donga.ac.kr/~dlim)
1996  7월 5일- 7월11일  제 8회 개인전 (서울아트페어, 예원화랑 초대)
1997  5월23일- 5월28일  제 9회 개인전 (서울아트페어, 공간화랑 초대)
1999  8월 1일- 8월14일  제10회 개인전 (FOX Art Center초대, 미국)
2001  9월26일-10월 8일  제11회 개인전 (인사 아트센터 초대, 서울)
2003  8월24일-10월24일  제12회 환경조형전(조선 화랑 초대, 서울)
2005  4월 5일- 4월16일  제13회 개인전 (Galerie Gana Beaubourg 초대, 파리)
2006  6월 7일- 9월4일    라 데팡스 “임동락 조각 초대전”
                        (라 데팡스 광장 및 그랑드 아쉬 미술관, 프랑스)
2007  4월29일- 8월30일  독일 바덴바덴시 초대 야외조각전 (레오폴드 광장, 독일)

그 외 250여회의 국제전, 초대전 및 300여회의 단체전 참가.

 

베니스 영화제 특별상 한국조각가 작품으로 수여



베니스 영화제 특별상 한국조각가 작품으로 수여

-동아대 임동락 교수 조각작품  제69회  베니스영화제 특별상으로 제작
-베니스 국제 조각 설치전에  2달간 초대전시
동아대 임동락 교수(조각학과·사진)의 작품이 올해 베니스영화제의 디렉터 특별상 트로피로 제작된다. 또 같은 기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8월 29일 오픈)와 베니스국제영화제(8월 28일오픈~9월 8일)가 열리는 인근 광장에서 두 달간(8월30일~10월30일) 초대전시를 갖는다.
임 교수는 오는 8월 개막하는 제69회 베니스영화제의 디렉터 부문 특별상 트로피로 그의 작품 'Point-Mass'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1932년 5월에 창설된 이 영화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국제 영화제로 그랑프리는 황금사자상으로 불린다. 그의 작품은 붉은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된 30×30×42㎝규모의 원형이다.

이와 함께 그는 8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 인근인 리도섬 산타 마리아 엘리자베타(S.Maria Elisabetta) 광장에서 개최되는 국제조각설치전 '오픈 2012’에도 참가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함께 열리는 오픈(OPEN)전은 올해로 15회를 맞는다. 이 전시는 세계적인 조각가 아르망, 루이스 부르쥬아, 세자르, 데니스 오펜하임, 키치헤링 크리스토, 리챠드롱, 마크퀸, 쟝 삐에르 레이노, 니키드 쌩팔, 미모 로텔라, 베르나르 브네, 류 민쥰, 왕강이 , 등 유명 조각가가 참여해온 전시회로 스페셜 솔로 전시는 임동락이 처음 이다
.

특히, 이번 전시는 주최 측에서 특별히 솔로 전시개최를 제안함과 동시에 “임동락 조각전”만 전시기간을 1개월 연장하여, 유럽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성수기에 2개월간 장기 전시를 하도록 배려하여 이루어 졌다.

이번 “조각가 임동락 베니스 야외조각 특별전”은 이태리 Arte Communication 이 베니스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주최하고 이태리 외무성, 문화성과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일신문화재단의 후원으로 2012년 8월30일 - 10월30일까지 2달간 개최되며, 이태리 베니스 리도섬 Piazzale S.Maria Elisabetta광장에서 Granviale Santa Maria Elisabetta, Lungomare G. Marconi 로 이어지며 전시된다. 또한 전시 입구 야외광장에는 태극기가 게양된다.

“OPEN”2012 전시에는 임동락 조각전과 함께 깃발(Flags)전이 열리는데 오노 요코(Yoko Ono)가 만든깃발과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의 깃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이 전시는 깃발의 재질과 그 성격을 살린 전시로 베니스 리도 섬의 산타 마리아 엘리자베타 광장과 산 세르볼로 섬에서 전시된다.

임동락의 야외 조각전에 선보일 작품은 높이 약 2~7m에 이르는 대형조각 9점으로 동양적 이원론을 기초로 하여 하나의 개체가 모여 전체를 이루고 또 전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프랙탈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등을 소재로 표면을 거울처럼 매끄럽게 가공해 주변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작가는 기존의 아날로그적 조각 작업 형태에서 벗어나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적인 작업으로 주목을 받으며 2006년 6월에서 9월까지 3개월간 프랑스 파리 신도시인 라데팡스 광장과 신 개선문인 그랑드 아쉬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고 연이어 2007년 4월에서8월까지 5개월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야외조각 초대전을 열였으며 전시 작품 가운데 하나인 ‘Point-성장’ 이라데팡스에영구전시되고있다.
라데팡스에는 세자르, 칼더, 미로 등 세계 거장 53명의 작품들이 영구 전시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45번째 영구 전시 목록에 올랐고 아시아 작가로는 두 번째이다.
.

한편, 임교수의 조각작품은 내년에 네덜란드의 한 소도시에도 들어설 예정이다. 임교수는 “지난4월 중순께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을 통해 네덜란드 HVA 컬쳐 펀드 측으로부터 작품 (‘포인트-성장’)을 네덜란드 동부 인구 11만명의 에드(Ede)라는 도시 중심가에 설치하고 싶다는 요청이 와 최근 이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 김학재 참사관은 “HVA 컬쳐 펀드 측에서 파리 라데팡스에 설치된 임 교수의 작품을 보고, 그의 작품을 높이 4~5m 크기로 내년 말까지 도심에 설치하기 위해 진행중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파리에 인터내셔널 시테 데자르 (Cite Internationale des Arts) 로부터 스튜디오를 제공 받아 한국의 유망한 작가들을 발굴하여 입주시킴으로써 프랑스에서 활동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2012년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Exchange」展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2012년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Exchange」展
○ 창동전시[Over and Over]
2012. 08. 24(금) _ 10. 21(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김영현, 박소영, 이택수, 주세균, 최윤정, 최해리
○ 김해전시[Explore]
2012. 08. 24(금)  _ 11. 04(일)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큐빅하우스
뮌, 박기진, 이문호, 장성은
tel. 055 _ 340 _ 7003
www.clayarch.org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2012년 다섯 번째 특별전으로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 Exchange」展이 개최된다. 이번 교환전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창동창작스튜디오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세라믹창작센터의 입주 및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교환전의 형식을 통해 작가 간, 지역 간의 소통을 도모고자 기획되었다.「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 Exchange」展 은 「익스플로어Explore」,「오버 앤 오버 Over and over」 라는 각각의 주제를 가진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된다. 이 중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입주 및 출신 작가 - 김영현, 박소영, 이택수, 주세균, 최윤정, 최해리 6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오버 앤 오버 Over and over」가 창동창작스튜디오에서 막을 올린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권미옥 학예사는 “이번 전시는 지역 간 작가 간 네트워크를 공유함으로써 두 기관의 상호협력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작가 및 전시 콘텐츠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또한 “창작의 공간을 넘어 소통의 장으로 변화하는 국공립창작센터의 양상을 전시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2년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Exchange」展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2012년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Exchange」展
○ 창동전시[Over and Over]
2012. 08. 24(금) _ 10. 21(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김영현, 박소영, 이택수, 주세균, 최윤정, 최해리
○ 김해전시[Explore]
2012. 08. 24(금)  _ 11. 04(일)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큐빅하우스
뮌, 박기진, 이문호, 장성은
tel. 055 _ 340 _ 7003
www.clayarch.org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2012년 다섯 번째 특별전으로 「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 Exchange」展이 개최된다. 이번 교환전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창동창작스튜디오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세라믹창작센터의 입주 및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교환전의 형식을 통해 작가 간, 지역 간의 소통을 도모고자 기획되었다.「국․공립창작스튜디오 교환전 : Exchange」展 은 「익스플로어Explore」,「오버 앤 오버 Over and over」 라는 각각의 주제를 가진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된다. 이 중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입주 및 출신 작가 - 김영현, 박소영, 이택수, 주세균, 최윤정, 최해리 6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오버 앤 오버 Over and over」가 창동창작스튜디오에서 막을 올린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권미옥 학예사는 “이번 전시는 지역 간 작가 간 네트워크를 공유함으로써 두 기관의 상호협력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작가 및 전시 콘텐츠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또한 “창작의 공간을 넘어 소통의 장으로 변화하는 국공립창작센터의 양상을 전시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움직이는 상자, 그 속에 비밀이 숨어있다.


움직이는 상자, 그 속에 비밀이 숨어있다.
독립 큐레이터 이진영

 2012 프로젝트비컴의 기획 전시는 우연찮은 기회에 시작되었다. 그동안 프로젝트비컴은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생성된 작가들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고 이러한 작품을 감상한 대다수의 사람들 생각이 변화되어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문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준비한 이번 전시는 창의적 아이디어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한 밑거름으로 그 행보가 시작되었다. 이번 ‘움직이는 상자’展은 지자체 문화 기관인 (재)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의 주최로 이루어진 프로젝트비컴의 기획 전시이며 사회공헌문화사업을 추구하는 회사 (MPK그룹, (주)무라사키스포츠, (주)위드아티스트커피, 아름다운성형외과, (주)ICbanQ, 비비드강)들의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는 적극적인 전시 관람 문화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참여와 상호 작용을 통해 더 큰 창조적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지자체를 비롯하여 여러 기업의 협찬을 통해 이루어진 이 전시는 문화 예술을 통한 기업의 사회 환원의 의의와 충무갤러리가 향 후 문화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 한다. 또한 누구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이번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점진적으로 향상되어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번 전시 ‘움직이는 상자‘ 展에 참여하는 예술가 10명(김영재, 김은영, 노미경, 레이박, 오상준, 오 영, 임정은, 정채희, 정환선, 조혜경)은 고정 관념에서 탈피한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해석을 토대로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설치, 회화, 판화 등의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생물학, 건축, 디자인, 서양화, 판화, 의상, 레이저광 정보공학, 3D미디어영상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하고 장르와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30, 40대 작가들이다. 이들은 이번 전시에서 ’상자‘,’움직임’ 이란 기존의 개념을 재해석하여 탄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건축가 김영재의 작품 「geo-softhard ice-cream」은 과거 Resetting Compass (가나아트 스페이스 2007), Bilaterian Nation (Gallery Plant 2010), 패션 문화에 물들다(국립중앙 박물관, 2010)에서 이어지는 기하학적 ‘공간 가르기’는 네 번째 경험이며,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작품은 공간속의 공간이 만들어 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어느 지정된 지점에서 이 공간을 바라보며 실제 공간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할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 받으며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작가는 “아이스크림 공장은 추상적 형상과 근원적이며 중성적 장소로 표현하였지만, 이번 전시 역시 어떠한 표현적 은유나 상징적 되새김은 없다. 있다면 시선과 궤적에 대한 메타포(metaphor)만이 존재한다.” 라고 언급했다.
 김은영 작가의 「안과 밖 인식의 상자」작품은 13개의 상자들이 원형 공간으로 설치되어 상자의 안과 밖이 존재한다. 상자로 시작하여 상자 안, 상자 밖, 상자들이 만든 원형 공간 안에 들어가게 되지만 상자의 시점에서는 결국 그 안은 밖이 된다. 크게 보면 설치된 상자의 바깥 공간이라 여겼던 공간마저 갤러리 공간의 안에 해당 된다. 또 갤러리 안은 갤러리 밖에서 보면 안쪽 공간이 되고...결국 안과 밖은 움직이는 쳇바퀴와 같다. 설치된 상자를 보면 관람자들은 안쪽 공간과 바깥 공간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안과 밖의 공간은 어느 곳 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패션 디자이너 노미경의 작품 「감싸주세요(abbracciarmi)」는 4개의 설치 작품으로 몸체와 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으로 다가서면 움직이는 몸체들이 꼭 자신을 감싸 안아 줄 것만 같은 움직임과 마주 한다. 실제로 관람객들은 이 작품의 기다란 팔을 본인의 신체에 부착시켜 본인 또는 상대방을 감싸 안으면, 서로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내면의 감성이 전달된다. 누구나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지만 작가는 투명한 몸에 움직이는 팔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장치를 함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보듬기 위한 방편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레이 박 작가의 「영감」은 상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영감’을 180도 홀로그램 작품으로 표현했으며, 유대교의 우주관을 담은 내용이 종이에 담겨져 우주의 상자를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함께 ‘공존’되는 것을 홀로그램으로 표현되어진 이 작품을 통해서 사람 관계의 공존과 자연과 인간의 공존, 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공존’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골프코스 설계가 오상준의 「움직이는 상자」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작품의 형태가 완성된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상자를 접근하였다. -전통적인 Box의 개념은 직육면체 형태의 단단한 용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을 뒤집어서 ‘Box = Rigid, Box = 90 degree’ 가 아닌 ‘Box allows person to interact with itself’ 의 개념을 완성한다.- 움직이는 상자는 전통적인 직육면체 구조물의 형태로 상자 안쪽에 LED 조명을 설치한 일종의 빛의 상자이다. 빛의 상자에 들어가는 관람객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다양한 형상의 변형된 상자를 만들게 된다. 이로서 상자는 변화되어지고 또 따른 모습으로 탄생되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오 영 작가의 「안락한 풍경」은 사회화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가져야만 하는 심리적 자기보호 기제를 집으로 표현한 작품으로서 그림에 보이는 집들은 각자가 지은 심리적인 집이다. 그 심리적인 집의 역할은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유사하기에 집의 형태를 빌려왔으며 심리적 완충 상자 역할을 담당한다. 어찌 보면 각자의 심리적 집은 그들의 감성의 공간이자 그들의 생각을 움직이는 틀(상자)로 만들어진 정신적 집이라 여겨진다.
 임정은 작가의 「separation of cube」는 겹(Layer)이 합쳐지면 입방체로 보이며, 보는 시점에 따라 그 이미지들은 다르게 보인다. 여러 겹(Layer)의 각층에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은 빛과 시선에 따라 관람자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하여야 확인되는 시각적 유희이다. 작가가 의도한 위치를 찾아 특정 시각에서 보면 정 입방체 형태의 구성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업이다. 관람객의 자발적인 행동은 시각적 놀이를 넘어서 그림을 보고, 느끼며, 연상 과정에서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시도가 될 것이다. 끝으로, 일반적으로 ‘그림자는 검정’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형형색색의 그림자를 통해 환영적인 공간과 입방체의 그림자놀이를 경험할 수 있다.
 정채희 작가의 「념(念)」은 상자 속에 담긴 기억 속 풍경이다. 그 기억의 순간들은 옻칠로 각인되어 작은 상자에 담아 보물처럼 언제든 작가와 함께 이동할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그 안에 담긴 풍경은 세상 밖 형상에 빗대어 그려진 작가 내면의 이야기이며 그 상자는 때때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정신의 공간, 사유의 방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렇게 질문하고자 한다. “ 당신의 작은 상자 속에는 어떤 풍경을 담고 싶은가? ”
 정환선 작가의 「together」 작품은 두 개의 거울이 각각 동양과 서양을 대변한다. 칠보함은 동양화의 물감에 의한 동양화법(민화속의 함들이 역삼각형으로 그려져 있듯 그러한 형태를 따른다.)으로 그려지며 유럽풍 장식의 거울은 캔버스에 오일 물감으로 사실적인 재현의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작가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혼재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서구화된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그 혼재(특히 화법의 혼재)는 때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기도 한다. 동양인으로써 서구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 모순된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작가는 거울 속에 비춰진 그 혼돈의 마주 대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조혜경 작가의 「responsive rhythm」은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자연의 소리, 움직임들은 무수하게 반복 재생산 되어 진다. 작가는 자연의 숨겨진 리듬들의 이미지들을 무한한 빛으로 표현하였다. 빛 속의 빛의 투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움직이는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미지들 속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시각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며 그와 동시에 그 속에 녹아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다양성이 켜켜이 녹아들어 다채롭고 복합적인 전시 공간을 연출하였으며 특히 로비에 설치되어진 상자조형물에서 그 상상의 마지막 포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의 공동 작품‘Maze-go-round’는 김영재 건축가의 디자인과 참여 작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최종 작품은 전시 기간 동안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에 의해 완성되어진다. 꿈과 희망으로 성장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공동 작업은 상자 속 세상에서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 공간으로 조성된다. 또한 아이들은 이번 전시와 함께 진행되는 창의교육프로그램「쁘띠조형연구소와 함께하는 ‘움직이는 상자놀이’」의 참여로 정서적 교감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무한 상상의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무수한 전시들과 다른 이슈가 있다.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가능성을 넘어선 도전과 열정에 정면 승부를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전시를 이루어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진하여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이루어 낸 이번 전시는 프로젝트비컴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다. 이번 전시는 프로젝트비컴의 정신과 닮아 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탐닉하고 창의적 발상을 시각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그 결과물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러하다.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이 무한 반복되어 질 수 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대중과의 긴 호흡으로 인해 프로젝트비컴이 이 시대에 변화시키고자 하는 문화적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날을 고대해 본다.




건축가 김영재와의 인터뷰


건축가 김영재와의 인터뷰

충무아트홀 에서 Anonymous Contents를 운영하는 건축가 김영재씨를 만났다. 프로젝트비컴이 기획한 <움직이는 상자>展에는 10명의 작가 작품들 중에 ‘Geo-softhard ice-cream’이 설치되어 있다. 몇 일 동안 설치에 여념이 없는 김영재 건축가에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몇 가지 인터뷰를 청해 보았다.

1. 이번 전시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한 흥미로운 전시라고 생각되는데 건축가이신 김영재 소장님은 어떻게 <움직이는 상자>展에 참여하시게 되셨나요?
프로젝트비컴과는 2007년 Connexion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첫 번째 그룹전에 참여한적이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움직이는 상자(moving box)를 통해 ‘박스-내용을 담는다는 기능적인 XX와 동시에 기하적 형식언어를 갖는다’는 점이 ‘움직인다- 단순히 물리적 이동이 아닌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황적 관계성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건축가인 저의 관심사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2. 이번 전시 <움직이는 상자>展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시각 또는 기하적 요소들의 설치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선생님은 이번 전시에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이 어떠하리라 예상하나요?
개인적으로 건축 활동 이외에 지속적으로 전시를 통한 설치 작업을 해왔습니다. 늘 저의 설치의 주제가 되어왔던 주체와 객체의 시각적 관계(visual connection)가 만들어내는 일차적 상황이 다시 이번 전시에도 재설정 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반응(thinking)이란 저의 프로젝트개념에서 일부러 배제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전시와 관객이라는 이벤트적인 상황보다는, 눈을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역할은 설치된 작품과 일대 일의 연결성을 가진, ‘보인다’의 역할을 하는 프로젝트의 완성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작품과 보는 사람(viewer)사이의 일직선적 시각적 순간(Visual moment) 만이 저의 프로젝트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객체 혹은 외부세계(world)를 경험하는 인간의 인식작용은 그 무엇보다도 시각을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자극의 80% 이상을 시각에 의존하는 인간의 눈(eye)의 효율은 애처로울 만큼 비효율적이고 무능력합니다. 이렇게 과대평가된 눈(eye)의 역할과 사고(thinking)의 관계성을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묻는 작업입니다.

3. 그렇다면 선생님은 ‘Geo-softhard ice-cream’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모든 시각적 형식언어는 기하(geometry)로 귀의합니다. 항상 개인적으로 느끼지만 공간 만들기의 보정작업 (revision)에서 무엇보다도 ‘기하’는 강력합니다. 또한 기하(geometry)는 역사성과 관계없이 그전부터 존재해 왔던 사실(fact)이며 동시에 가장 보편적이며 중립적인 도구(medium)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어진 공간 내에 작가가 개입시킨 기하적 요소(geometrical elements)와 관람자(eye) 위치 관계를 시각적 경험을 통해 순간적인 모멘텀(momentum)을 들어내는 것이 저의 주된 개념입니다. 이때 저의 역할은 창조자의 입장이라기 보단 감독에 가깝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질 그 무엇에 대한 작업중의 선택은 작가의 색깔 없이 가장 무성적이고 객관화된 행위이지만, 여전히 디자인 과정 중의 작위적 선택과 임의성은 필연적으로 유효하다고 봅니다. 바로 이 부분이 건축가인 제가 노출할 수 있는 유일한 메타포(metaphor)라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과거 ,, ,<패션 문화에 물들다, 국립중앙 박물관, 2010>에 이어지는 기하학적 ‘공간보정하기’
의 네 번째 이야기이며, 계속 되어 질 현재 진행형의 중간프로젝트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두 개의 다른 형식적 물성의 기하학적 구축을 통한 ‘관계 맺기’입니다. 이렇게 구축해낸 공간 속의 벽에 새겨진 평면적 오브제는 기하학적 질서를 통해 실제 현실공간과 치환되거나 교차되어 추상적 느낌의 일루전적 시각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시각적 구조는 형상언어- 허상과 실제가 기하적 구성을 통하여 관람자에게 오직 표상적 단계에서 어떻게 같은 속성을 갖출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입니다.
전시는 크게 세 가지 파트로 이루어집니다. 1. 주어진 전시공간이 가지고 있는 그리드 시스템과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질서로서의 중첩된 프레임을 설정하고 2. 새로운 그리드 시스템과 허상의 오브제( 4.5m X 4.5m X 54m)로서의 투시적 배치를 하고. 3.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관람자 시점(eye point 0) 에서 투사시키면. 이 때 시각적 인식은 평면적 무질서에서 다시 바라본다는 입체적 시점으로 이동된다. 더 이상 우리를 “보인다?”라는 형식언어로서의 점, 선, 면과 공간의 경계는 사라지고, 공간은 더욱 더 확장된 나를 둘러싸는 공간적 깊이(spatial depth)로 형성된다. 이러한 융합적 속성은 때론 소프트하고 때론 딱딱한 느낌이지만, 응축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다. 때론 달콤하지만 또 다른 뒷맛을 만들며, 녹아내려 없어지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 이 아이스크림 ‘공장’은 추상적 형상과 근원적이며 중성적 장소로 표현하였지만, 이번 전시 역시 어떠한 표현적 은유나 상징적 되새김은 없다. 있다면 시선과 궤적에 대한 메타포(metaphor)만이 존재합니다.

4. 이 작품과 동시에 선생님의 디자인으로 제작된 공동 작품 ‘Maze - go -round’의 탄생 배경과 이 작품이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요?
이 공동작업이 아주 단순한 접근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회전목마(merry-go-round)에서 유추되었듯이 건축가로서 아이들에게 조그만 기하적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로비공간 안에서의 거대 오브제로서 작동하는 동시에 또한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기도 합니다. 28cm x 28cm 격자모듈의 박스 1000개가 모여, 길이 6m 높이 1.7m 의 구조적이면 동시에 형태적인 오브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기하학적 형태는 하나의 원 에서 시작되어 중심(center) 과 주변(arc)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파편화된 피자모양- 피자박스를 사용했다는 점-을 수직적으로 확장하고 그 안에 간단한 미로(maze)를 설치하였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한 부분에서 전체로 확장 된 개념적 놀이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피자 박스 라는 기능 (function) - 피자 모양이라는 형태 (form) ? 사용자(user), 참가자인 어린이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시점, 안과 밖, 스케일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경험시켜 주고자 했으며, 동시에 전시기간 동안 계속 만들어질 어린이들의 캔버스이면 동시에 전시 벽의 역할도 수행합니다.

5. 건축을 전공하시고 건축가로 명성을 쌓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순수 예술과 협업하는 전시를 하시며 외도하시는 이유는?
저는 항시 ‘건축은 건축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흔히 건축을 종합예술이라고 이야기하는 점이 건축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재현하는데 방해되거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디자인이나 설치작업에 있어서 입장을 구별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개념과 도구(tool)를 사용하여 재현(representation) 점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없다고 봅니다.

6. 창작을 하는 대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질문인데 김영재 소장님은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가 들 경우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하시는지?
술 마시고 넋두리합니다. 저도 모를 얘기를 지인들이랑 하다 보면 다시 생각이 정리되면서 무언가 새롭게 정리가 되더군요. 주관의 객관화라고 할까요 아니면 셀프정화 (Self-refreshing) 시스템 이라고나 할까요…

7. 마지막으로 김영재 건축가의 삶의 철학이나 꼭 이루고 싶은 다음 단계의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기존 전시에서 일관성 있게 지키려고 한 태도(attitude)는 가장 저렴하고 소량의 재료만을 사용하여 공간 속에 설정(set-up)된 기하를 통한 양적인 효과(effects)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과   또한 이런 공간적 설정은 항시 주어진 전시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정보(topographical information)에서 유추되어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전시 후에는 폐기되어져야 한다는 일회성이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음 전시는 ‘flying whale’이라는 제목으로 시각적 관계성만이 아닌 viewer가 참여하여 그 변위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affordance’ 개념을 사용한 전시를 구상 중입니다.


이보람,Lee Boram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 이보람의 청각적 메타포와 회화미학
김종길 | 미술평론가
더미를 태우는 불꽃
매일 아침,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미학이 불타고 피 묻은 철학의 거죽이 내 걸린 세계의 뉴스를 들으며 잔혹한 인간의 폭력에 절망한다. 세계는 인간이 모든 생명과 문명과 역사를 파괴하고 살육하는 거대한 도살장. 그 안에서 목숨을 찢는 피의 목청이 벽을 뚫는다. 시원의 도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서, 티베트의 라싸에서 그리고 도시난민이 불타는 서울의 용산에서 ‘최저 낙원’을 향한 인간의 꿈은 곤두박질쳤다.
이제 우리는 잔혹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맞불을 놓는 방식으로 칼을 들어 사악한 인간의 중심을 내쳐야 할지 모른다. 세계평화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서슴지 않는, 자기부정의 모순에 빠진 인간의 희망은 더 이상 평화의 중심으로 치닫지 못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유하리라는 따위의 상상조차도 자본 가치로 환원해 버리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예술론은 더욱 절망적이다.

▲Crying 3, 2012, Oil and acrylic on canvas, 73 x 61 cm.jpg

그러나 1952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아니, 다시 6?25 한국전쟁의 검은 아수라(阿修羅)가 휘몰아 칠 때, 사무엘 베케트는 존재의 절망과 불안을 ‘고도(Godot)’의 불꽃으로 피워 올렸듯이 우리는 아직 비관에 이를 수 없다. 문명화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은 미래지향적이며, 예술을 통해 우리는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순예의 예지적 전망은 숭고하다. 그 소리는 우리 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또한, 문학은 황폐의 공간이며 그런 공간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던 모리스 블랑쇼는 희망이 사라진 ‘절대적’ 밑바닥에서 진리와 인간의 미래를 긍정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에 대해 “근대성이 쌓아올렸던 거대한 이념 더미를 태우는 불꽃을, 그리고 이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주었으며, 이 잿더미 가운데서 근대성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죽음의 미사를 집전하고 근대성의 조종을 울린 사제(司祭)”라 말하며 탈근대 철학자라 치켜세우는 데는, 그런 ‘황폐함’의 절대적 공간에 대한 사유가 존재한다.
베케트의 ‘고도’에는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러하듯 포조의 실명과 두 주인공의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허무와 비극의 세계인식이 떠돈다. 부조리한 삶에 깃든 블라디미르의 실존적 독백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는 비극적 세계의 내부 묘사에 다름 아니다.
이보람의 회화를 읽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의 현실을 깊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들끓게 하고 누군가는 들끓는 현실과 싸우고 또 누군가는 들끓게 하는 그 누군가에게로 총을 들고 달려드는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보람의 회화가 그런 모순의 세계를 재현하거나 증언하기 위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곤두박질하는 인간의 꿈에 대해 사유하면서 예술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아직 비관에 이를 수 없다면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예지적 전망은 무엇이며, 희망의 잿더미에서 피워 올릴 수 있는 불꽃의 씨알은 무엇인지 묻는다. 나는 핑크빛이 도는 그의 회화가 그 씨알들의 희미한 불꽃이라 생각하며,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희미한 회화적 질감들조차도 그렇게 느낀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허구적 상상력이 아니라 현대사의 구체적인 사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그 사건들이 전하는 언론 속의 이미지와 소리, 문자언어를 사유함으로써 사무엘 베케트나 모리스 블랑쇼, 주제 사마라구가 보여주었던 예술적 상상력과 만나고, 그 상상력의 회화적 실체로서 세계를 향한 상징적 메타포를 크게 타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희미한 잔상과 상징투쟁의 미학
구체적 사건들의 이미지 또는 문자들로 화면을 구성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건의 실체와 맞닿지 않고 문자는 언론처럼 그 진실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다. 그는 원본의 이미지가 획득하고 발산했던 강력한 미디어적 속성을 제거한 채(휘발시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마치 희미한 잔상들처럼 화면에 등장시킨다. 단색 톤으로 바꾸고 채도를 내린 인물 이미지들은 가까이 가서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다. 멀리서 알아 볼 수 없으니 작품의 시각언어가 쉽게 청각언어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시각과 청각이 충돌하면서 보고 듣고를 구분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안개에 물려서 희뿌연 한 덩어리들로 희미했던 것들이, 안개가 걷히면서 투명하게 팽창하는 공기와 그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물들이 쟁쟁거리던 그 느낌들과 다르지 않다. 신문이나 포스터가 갖추고 있는 사진이미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적 시각언어와는 정반대의 모순어법이다. 그의 작품들이 신문의 사진이미지를 일부 차용해서 제작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어떤 이미지를 차용하되 부분들의 세부를 나누어 몽타주하듯 배치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화면 전체로 ‘전면화’ 시킨 것이기도 하고, 전체의 일부분만을 이용해 그 부분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시각언어를 ‘극대화’ 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면화와 극대화의 화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희미한 시각성’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나는 위에서 베케트와 사마라구의 작품이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허무와 비극의 세계인식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의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라는 독백을 통해 드러났다. 베케트의 ‘고도’는 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사마라구의 세계는 눈먼 자들의 세계였다. 그래서 오히려 ‘외침’의 소리가 컸다. 이보람의 희미한 시각성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들의 기다림이라면, 청각성은 블라디미르의 독백으로 울린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듯이, 그는 비극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듯 시각성을 희미하게 두되 오히려 전면화?극대화시킴으로써 이미지의 청각성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그것은 회화적 메타포의 크기와 비례한다.
회화적 시각성은 눈앞의 현실이요 실체라면, 회화적 청각성은 은유요 상징이다. 실체로서의 회화가 나의 눈앞에서 전경으로 펼쳐져 있다면, 상징으로서의 회화는 보이지 않는 나의 눈 뒤에서 후경으로 열려져있다. 전경은 감성의 단순한 요소, 즉 형태와 색채에 관련한다. 후경은 보다 깊고, 보다 심오한 요소에 집중한다. 우리가 이보람의 회화적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경을 살펴야 한다.
후경은 한 마디로 깊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초상화의 전경 배후에서 나타나는 것을 더 가까이 관찰하려고 하면, 우선 첫 번째 층에서는 그려진 인물의 순순히 외적인 측면, 즉 물적인 것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서 회화의 이차원성에 대립하는 삼차원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후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인데, 비로소 생동감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이 생동감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다시 심리적인 존재,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생명체에서 얼굴표정, 전체적 형상, 거동, 태도 등에 의해 만나게 되는 내면적인 것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서 얼굴표정 속에 감춰진, 예컨대 렘브란트가 그의 초상화에서 깊이 있게 표현해낼 줄 알았던 인간의 운명 같은 것이 드러난다. 이 운명성 역시 가장 최후의 층은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야만 우리들 모두에게 적합한 보편적 인간성이 두드러질 수 있다. 그리고 최후의 그곳에서 우리는 작품에 투영된 예술가의 정신과 만나게 된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청각의 메타포는 상징투쟁의 미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외침으로 가득하며 그 외침의 언어를 통해 허무와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물의 초상에 종교적 상징성까지 부가함으로써 그의 작품을 숭고의 어떤 상태로 상승시키고 있다. 
희생, 인간의 피에타
(2011. 이하 )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은 몇 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말로 희생자에 속하는 ‘Victim’은 피해의 의미가 크고 제물, 희생물의 의미가 더해진다. 희생(犧牲)의 본뜻도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祭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희생자가 단순히 어떤 사고의 피해자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흔한 범죄와 질병이라기보다는 인류가 처한 위험한 묵시록적 상황들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그것은 인류가 문명을 탄생시킨 이래 단 한순간도 멈춰본 적이 없는 전쟁에 관한 것이다.
선과 악, 신과 악마의 전쟁 같은 신화적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하며 인간이 인간을 살육했던 인간의 전쟁을 일컫는다. 돌도끼에서 창으로 칼로 활로 총으로 포탄으로 핵으로 싸우고 죽였으나 이제 인류는 디지털 게임을 하듯 작전을 펼치고, 전운이 돌지 않는 곳에서 참혹의 세례를 퍼붓는다. 문명이 빠른 자들의 전쟁은 피의 목청이 뚫지 못하는 게임방 같은 시설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어가며 단추를 누르지만, 문명이 더딘 자들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느라 무섭고 또한 참혹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Lamentation’이다. 이 말의 용도와 뜻이 끝없다. 애통, 한탄, 통탄, 비탄, 통곡, 탄식, 애도의 뜻이니 ‘탄(嘆)’의 의미가 크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통곡의 (1304~1306)을 제작하기도 했다. 피에타와 달리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의 몸짓을 그야말로 인간의 감정으로 그려 넣어 생동감을 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에서는 ‘라멘타찌오lamentazione’가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弔歌), 비가(悲歌)를 가리키기도 한다.
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인물의 반신상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한 뒤 푸른빛이 도는 단색조로 그렸고, 그 둘레에 손가락과 건축물의 잔해, 검은 연기, 그리고 눈알들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파괴된 잔해와 검은 연기들 속에서 전쟁의 공포를 상상하게 되고, 무수한 손가락들에서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참혹을 후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이 세계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화면을 배회하는 눈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눈물의 현실을 볼 수밖에 없는 비극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의 손이고 눈이지만,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통곡의 외침일 것이다. 
(2012)은 의 회화적 차원(dimension)을 더 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두상, 반신상, 전신상으로 나뉘어 부분과 전체가 몽타주 되듯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고, 그 사이로 총열처럼 쌓아 놓은 손가락들과 총알들이 난무하고 있다. 인물들은 모두 통곡의 순간들에 직면하고 있으며, 손으로 입과 얼굴을 감싸 쥔 채 오열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여기에도 네 개의 눈알이 떠돈다. 열 개의 눈이 화면 밖과 화면 속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던 과 달리 의 눈은 화면 밖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정면으로. 그리고 화면 상단 두 곳에 거칠게 회칠하듯 붉은 색을 발랐는데, 거친 색의 육질이 그동안 ‘희미한 시각성’을 유지했던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피의 목청이 시각적으로도 어딘가에 도달하려는 듯한 의지들로 읽히는 것이다.

    
▲Lamentation For Lamentation 1, 2012, Oil and acrylic on canvas, 163 x 130 cm.jpg
그러한 의지는 올해 제작된 (이하 ) 연작들에서 기념비적으로 등장한다.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붉은 색의 육질로 정교하게 세워놓은 신전(혹은 제단)과 그 내부를 회오리치는 문자언어의 띠지가 있을 뿐이다. 그는 문자언어의 단어들로 청각언어를 극대화하는 모험을 감수했다. 오열하는 인물, 통곡하는 인물, 비탄에 찬 인물들의 표정이나 그것의 심리적이며 상징적인 메타포에 기댔던 것들이 이 작품에서는 그 오열과 통곡과 비탄의 소리들을 문자언어로 직접 제시함으로써 청각적 상상을 가능케 하고 있단 이야기다. 을 보자. 이 작품에는 이런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수니파성 하젬알자이디? / %의% 20일이이라크크 / 집으으로 시시 바바그그다드 크크 / 로 돌돌아아아 신신 드드드의의사사드르 / 오오자자자 / 신# / 이이 르시시티티에에 있는는 / !!!!!?라!! / 는 /이라 / 한한한!!!!!!? 이라크크크여여여 오오오열 하 / 바다그드바다그그????다??!!?%다드 / 로로로이 터터 / 있있있 다다 / 뉴 뉴시스스스
문장이 되지 못하는 이 말들의 언어는 전파가 고르지 못한 라디오를 연상시키면서, 급하게 타전되는 말들의 급진성을 내장한다. 예컨대 “수니파 성직자 하젬알자이디”라는 말이 들리고, “20일 이라크”, “집으로”, “시 바그다드”, “돌아, 신, 드의 의사 사드르”, “이라크여 오열하라”, “바그다드”, “로이터”, “뉴시스”와 같은 말들 또한 들리지 않는가! 의 문자들은 더 급하고 잔혹하다.
바그다드로이터 25일일 / 뉴뉴시시시이 라발발생 / 스스 크크 한한자 / 절절 바바그그다다드드에에에서서서!자살! / 절규 / 이이라라크 / 테테 여여성!!? / 절절규!규 / 규규 차차량량폭폭탄탄러러로 성이이 자자폭 하하고 / 로로 / 남남 부 상상 소소식을을 전해 / !테테러러!! / 해듣##!고고! / 있다다 이날날바 사망 / 편편이이 한한 / 알알만만지지구구 / 했했다다 / 수수르르 에서서 / (…)
25일 바그다드 로이터 통신에 따른 기사가 주 내용인 듯하다. 이 국제뉴스를 국내로 타전하는 것은 뉴시스다. 단어들만 뽑아 올리면, “바그다드에서 자살”, “절규”, “차량 폭탄 테러로 여성이 자폭하고”, “남부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듣고”, “테러”, “민간이 1명이 사망하고”, “바그다드의 수르에서”와 같은 말들이다. 띠지는 모르스 부호가 타전될 때의 단타음을 상기시킨다.



자, 그렇다면 이 소리들이 타전되는 곳은 어디일까? 아군? 적군? 아니다. 바로 우리다. 이보람은 인터넷을 도배해 놓은 세계의 사건들이 오히려 타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리는 무관심에 문제를 제기하듯, 회화적 청각성을 미학적 전략으로 전치시킴으로써 비극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타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Lamentation’이 조토의 의 그것처럼 인간의 희생에 대한 미학적 피에타로서의 상징이라면, 는 수없이 죽어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조가(弔歌)이자 비가(悲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숭고한 음악들처럼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를 노래하는 듯하다.


이보람(Lee Boram)

1980 전주 출생 / 한국
2004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학사 졸업, 서울 / 한국
2008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석사 졸업, 서울 / 한국
레지던시
2009 Neo-Prime 레지던지 프로그램 1기 입주 작가, 프라임 문화재단, 서울 / 한국
개인전
2012  애도에의 애도, 마이클 슐츠 갤러리 , 서울 / 한국
2011 CUT OUT, 송은 갤러리, 서울 / 한국
2009 Bleeding Pink, 아트 스페이스 H, 서울 / 한국
2007 무기력한 조합, 예술공간 HUT, 서울 / 한국

미술과 법률상식: 화가와 명품회사 사이의 법적 긴장관계


미술과 법률상식: 화가와 명품회사 사이의 법적 긴장관계
객원기자 박형연(법무법인 코러스 대표변호사)

불황의 시대에도 명품은 항상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명품시계, 명품가방, 명품 옷 그래서 명품을 사칭한 짝퉁도 등장한다. 식자들이 명품 밝히는 사회와 사람을 비난하지만 사람들의 명품선호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명품을 파는 회사들이 상업적으로 명품선호를 부추기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결함 많고 부조리한 것이 우리네 인간의 속성이기에 나의 부족함을 조금은 완벽하게 보이는 명품가방을 들고, 명품 옷을 걸침으로서 감추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명품의 사회학이 이러하기에 항상 시대를 앞서가고, 새로운 창작을 하는 화가에게 명품은 좋은 오브제가 되고 있다. 그림도 결국은 인간학 아닌가! 그래서 명품을 오브제로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는 어떤 갤러리 관장은 그런 작가경향을 싫어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이런 명품을 이용한 화가의 작업과 관련하여서는 명품회사와 법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고, 간혹 발생한다. 최근에 필자가 직접 관여한 사례가 있어, 오늘의 주제로 삼아본다. 
헌법재판소 근처에 위치한 갤러리 에뽀끄(관장 김희정)에서 2012. 6. 13 (수)부터  6. 26 (화)까지 작가 김혜진 초대전이 있었다. 김작가의 작품은 프라다, 구찌 등의 명품회사 광고사진을 일종의 오브제로 사용한 작품들이다. 그러다보니 갤러리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명품회사에 대하여 홍보메일을 보냈다.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회사인 프라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갤러리 에뽀끄 입니다 ^^ 김혜진전에 초대 합니다.
   김혜진 작가의 관련 자료를 보내 드렸습니다.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가 아닌 순수 창작물의 작품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 친절히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김혜진 작가님과 저희 갤러리 에뽀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갤러리는 이 메일을 보내면서 프라다가 이런 답장을 보내올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런데 답장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김희정 큐레이터님
   전달 해 주신 자료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광고 이미지를 배경으로 사용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한데 작가님께서 작품을 하시기 전에 저희 본사에 먼저 이러한 것을 알리시거나 사용여부에 대해 협의를 하셨어야 하는 건입니다. 프라다의 광고 비주얼은 본사에서 컨펌한 일부 잡지, 매체 등을 통해서만 사용이 가능하며, 저희 역시 포토그래퍼에게서 이미지 사용권한을 이러한 내용으로만 구매/ 사용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같은 브랜드 지사 역시 함부로 이미지를 사용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어느정도 저희 브랜드를 소재로 창작을 하신 것이라면 저희가 협의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겠지만 지금 작가님의 작품은 저희 광고 비주얼을 그대로 재연, 여기에 추가로 창작을 하신 것이기에 모티브로 한 창작이 아닌 원본을 그대로 재연 하신 것에 해당합니다. 이는 저희가 본사에 인폼을 하는 즉시 본사에서 액션을 취할 정도로 큰 이슈거리이기도 합니다.
   일단 작가분께 먼저 광고 비주얼 사용에 대해 본사와 협의 하신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문의 후 회신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러한 메일을 받은 갤러리는 법률전문가와 상의한 이후에 대처하지 않고, 프라다의 추가적인 법적조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다음과 같은 답장메일을 보내고 프라다 광고를 이용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에서 제외시켰다.  
   안녕하세요 갤러리 에뽀끄 입니다.
   저작권에 대한 부분이 예민하지만 저희가 간과한 점 정말 다시 한 번 사죄드리며 저희가  현재 시정 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빠르게 대처 하였습니다. 현재 웹상에 올라와 있는 김혜진 초대전에 대한 보도자료 중 PRADA와 관련 된 이미지는 모두 삭제 또는 삭제 요청 중입니다. 늦어도 오늘 중으로는 삭제됩니다 작가 분과 상의 하에 전시 예정이던 Prada와 관련 된 신작 1점이 당연히 제외 될 것입니다. 다른 업무 부분도 있으신데 저희가 갑자기 큰 걱정을 드린 것 같아, 정말 죄송할 따름 입니다.
   선처 부탁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갤러리 에뽀끄
갤러리는 막상 전시를 중단한 이후에 주위사람들에게 자문을 들어본 결과 섣부른 판단이라는 의견이 많자 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같이 사안을 검토하여 보니 필자가 판단하기에도 갤러리가 억울하다. 그래서 프라다에 내용증명을 보내서 과연 갤러리가 프라다의 저적권 침해가 있는지 시비를 가리자고 상호 합의한 다음에 “프라다 코리아 주식회사”에 필자 법무법인의 이름으로 내용증명을 보내기로 하였다. 필자가 내용증명 초안을 작성하여 프라다에 대하여, 귀사의 어떤 저작권을 갤러리가 침해하였고, 왜 갤러리와 작가가 작품활동과 전시(프라다에 대한 초청장 발송 포함)에 있어 귀사의 사전허가 내지 동의를 받아야 하는지 여부를 귀사 변호사와 법적 검토를 하여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고, 만일 한 달 이내에 적절한 대응(사안검토 및 사과)이 없을 경우에는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작가와 갤러리는 부담을 느꼈는지 내용증명을 보내지 말자고 하여 본건의 법적 진행은 여기에서 중단되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아쉽다. 과연 프라다 본사에서 위 내용증명에 대하여 어떤 대응이 나올지 궁금하기 때문이고, 작가입장에서도 과연 내가 프라다의 광고사진을 작업하는 것이 어떤 법률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갤러리와 프라다의 분쟁의 법적 쟁점을 나혼자 정리해보려고 한다.
우리 작가의 작품이 프라다의 권리를 침해할 여지가 있는 것은 프라다의 상표를 함부로 사용한 것에 대한 상표법 위반, 프라다의 광고사진을 저작권자(프라다 광고 사진의 저작권이 프라다에게 있을 수도 사진작가에게 있을 수도 있다)의 동의 없이 사용한 것에 대한 저작권 침해가 문제될 수 있다. 프라다 직원의 메일을 자세히 보면 작가나 갤러리가 프라다 상표를 함부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프라다 직원의 답변을 보면 “저희 광고 비주얼을 그대로 재연/ 여기에 추가로 창작을 하신 것이기에 모티브로 한 창작이 아닌 원본을 그대로 재연 하신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지금 작가님의 작품은 저희 광고 비주얼을 그대로 재연/ 여기에 추가로 창작을 하신 것이기에 모티브로 한 창작이 아닌 원본을 그대로 재연 하신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법률적으로 프라다 직원의 말을 표현하면 작가의 창작은 프라다 광고사진이란 1차적인 저작물을 바탕으로 2차적 저작물을 만든 것이고, 2차적 저작물을 만들려면 원저작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동의를 받지 않은 것은 저작권 침해라는 것이다. 
우리 저적권법은 2차적 저작물이란 기존의 원저작물을 번역, 편곡, 변형, 각색, 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을 말한다(저작권법 제5조)고 규정하면서 2차적 저작물은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보호되고, 2차적 저작물의 보호는 그 원저작물의 저작자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저작권법 제5조). 그리고 다시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을 원 저작물로 하는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하여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였다(저작권법 제22조). 따라서 우리 작가의 작품을 원 저작물(프라다 광고사진)을 이용한 2차적 저작물로 본다면 원저작자의 동의를 받아 작업을 하였어야 한다. 결국, 프라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작가의 작품은 프라다 작가의 광고사진을 변형 또는 각색하여 작성한 창작물 즉, 2차적 저작물로 파악하고 있고, 그렇게 못볼 것은 아니다. 실제 프라다 직원은 그렇게 본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프라다 식으로 본다면 화가의 창작의 자유는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고, 작가들은 크게 반발할 것이다. 그렇지만 분쟁의 대상이 프라다의 사진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가정하고, 그 작품에 대하여 변형을 가하였다고 생각하고 보면(프라다 사진작가와 우리 작가의 분쟁으로 보면 바로 본건이 그렇다) 이것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정답이 쉽지 않은 진지한 고민거리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프라다 사진을 변형한 제2의 창작물이냐? 아니면 프라다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순수한 창작물이냐? 하는 논점 말이다.  그래서 필자 입장에서는 프라다 법무팀의 변호사들은 과연 어떤 입장을 견지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그것을 들을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다. 솔직히 프라다 본사에서는 자신들의 제품이나 광고사진을 이용하여 순수창작을 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낄 수도 있다. 프라다 직원이 오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찌되었건 주위의 저작권 전문 변호사들에게 의견을 구해본 결과 우리 작가가 프라다의 저작권 때문에 창작활동이 방해받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필자의 생각도 그렇다. 프라다의 광고사진을 가지고 작가가 창작활동을 하는 것이 프라다의 이미지와 상품판매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프라다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입장에 따라서 참 어려운 개념이다. 어찌되었건 작가와 갤러리는 프라다 직원의 메일에 해당 작품 전시를 접어버렸다. 그리고 법적 대응도 접었다. 그래서 본건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것이 많다. 아쉬움이야 바로 흘려보내면 되지만 김작가가 본건으로 인하여 창작의욕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끝).

박대조 (Park dae cho)


The Blamelessness of Children 죄없는 아이들
글 _ 조나단 굿맨

박대조는 표현수단의 융합, 더 심각해진 상황들과 동시대 기억의 슬픔에 대한 충격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는 작가다. 그는 아이들의 사진위에 채색하는 작업을 한다.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대상들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표현수단을 결합한다. 미학적 의미에 대한 그의 진지한 문제인식은 그가 삶의 폭넓고 철학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세대에서 중견작가로서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상황의 어려움들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발전에 대한 관심을 예견한다. 또한 그의 작품들의 우아함은 그가 빛나는 이미지들의 매력과 짧지만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사진의 위력에 대해 그 누구보다 능통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순간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도 그에 내재되어있는 진지한 의미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간을 소요하는 작업이면서, 세계적인 한국 작품으로서 도전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역사적인 사건들의 윤리적 기준 중 하나는 원자폭탄에 연관된 우리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 원자폭탄 사건 전후로 우리가 생각해온 도덕적인 논리는 극명히 나뉘었다. 그의 Boom Boom 시리즈에서는 동양아이들이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그들의 동공 한가운데에 핵폭탄의 버섯구름이 그려져 있지만, 순수성의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시선에 죽음을 머금은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발산하고 있는 이 엄청난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우리는 미(美)와 죽음사이의 연관성이 있는 문학의 역사를 통해 이것이 흔한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아니라, 도발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 이 자리 존재하는 두 개념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핵폭탄에 대해 언제까지나 에둘러 언급할 수만은 없다. 이 아름다운 소녀의 눈은 고통으로 가득 찬 리얼리티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얼굴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전복시키는 엄숙함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을 완성시킨다. 파괴의 잔인한 암시에 대한 치열한 고뇌를 통해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혼합매체, 투명한 이미지, 소녀의 눈과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작품 City-Bred Child는 여러 면에서 Boom Boom 시리즈와 유사하다. 소녀는 얼굴 아래쪽을 천으로 가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밝은 초록색의 사각형이 얼굴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역시 Boom Boom 시리즈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강렬함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는 위험을 포함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직설적인 시각적 표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 다른 작품인 Broken Heart는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아크릴 채색 후 음각한 작품이다. 거의 검은색으로 보이는 어두운 초록색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표현된 일련의 시리즈들이다. 그의 유려한 테크닉과 감정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역작으로 손꼽힐만하다. Broken Heart는 아이들의 존엄성과 정신적인 가치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관심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심각한 의도가 작품의 따뜻한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가진 목적의식의 진지한 태도는 모든 방식의 삶을 존중하는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작품들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공공의 재앙들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어느 한국 소녀의 잊혀지지 않는 시선은 경험의 기억으로 인해 충격 받은 것처럼 보인다. 목격자의 시선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기억들과 마주해야만 한다. 아이의 눈 속에 비친 버섯구름에서 부조리를 깨닫지만, 결국 이들의 얼굴은 우리자신의 반영인 것이다. 박대조의 예술세계에서 표현된 사실주의는 아이들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원자폭탄의 끝없는 야만적인 폭력과 관련된 실재하는 존재를 채우고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보여 주기 위해 기억의 저편으로까지 내려간 것이다.
이러한 잔인함에 가까운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충동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아티스트들이 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은 아이들의 무고함과 잔인한 사건들을 대조시켜 바라보게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분명하다. 우리는 아이들 그자체로 순수한 사람으로 길러 내거나, 죽음과 파괴를 맛보게 할 수도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무한한 변화의 거울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범위는 순수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폭력성 또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윤리적인 책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실마리를 던지는 서술적 장면을 보여준다. 폭탄과 미(美)의 융합은 도덕적인 파괴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 각자가 안고 있는 세계적인 책임의식을 반영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하던지 혹은 아름다움에 감동받던지 간에 도처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깨달아야한다. 박대조는 미(美)를 받아들임으로서, 인류가 복용해야할 쓰디쓴 치료약에 달콤함을 더했다. 아직 우리가 치료되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박대조 (Park dae cho)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화 전공 석사 졸업
상명대학교 조형예술 디자인학과 박사 졸업
주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1169번지 솔뫼마을 현대홈타운 105동 203호
작품소장처 주소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996-3번지 대우월드마크 102동 307호
개인전(23회)
2012년 08월 30일 - 09월 20일 “디지아날로그전”(박영덕화랑)
2011년 05월 12일 - 06월 09일 “염원”(스탄자 갤러리)
2011년 05월 17일 - 06월 21일 “The heart of child"(Able fine art NY)
수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국립현대미술관)
2009 부산국제 멀아트쇼 KASCO상 수상

작품소장 :
싱가폴 국립미술관 / 호서대학교 / 국립현대 미술관 / 서울 시립미술관 / 경기도 미술관 / 경남 도립미술관 / 한원미술관 / 보성 녹차 박물관 / 상명대 박물관 / 원주 시청 / 갤러리 원 / 경향 갤러리 / 갤러리 정/ 갤러리 도스 / 뷰콜외 다수




 

박대조,Park dae cho


Park Dae Cho: The Blamelessness of Children

Park Dae Cho makes affecting works that reference the cool world of media and the greater circumstances, not without grief, of contemporary experience. He works by painting over photographs of children, joining two mediums to portray his subjects in a kind of purgatory. Park’s treatment of serious questions of esthetic import suggests that he is committed to a wide-ranging, philosophical  vision of real life. In many ways, like the midcareer artists of his generation, he straddles the difficulties facing not only Korean society but the global situation at large. His work presupposes an awareness of modernism and its postmodern developments, and the elegance of his surfaces make it clear that he is very aware of the lure of the gilded image, the photograph’s ability to stop time?even if only for a moment. The resulting images captivate in the instant they are viewed, but they also deserve greater meditation, in keeping with the serious implications of their content. This is work of its time, but there is also the suggestion that there is a future for them as documents of a challenged and challenging international Korea.

One of the ethical touchstones of our historical memory regards our feelings about the atomic bomb, which created a great divide in our moral reasoning before and after the event. Boom Boom, a photograph of an Asian child’s eyes?the lower half of her face is covered by a black scarf?would be a compelling image of innocence if not for the atomic mushroom clouds found dead center in each of her pupils. How do we understand the extraordinary weight of an image of a young child who carries death in her gaze? This is not a jaded image, but it does suggest a provocation: we know that through the history of literature, there is often a connection between beauty and death, but it is rare to find so obvious an identification between the two, as happens here. Perhaps the truth is that we can no longer afford to be roundabout in our presentation of atomic destruction, which threatens us still. The eyes of the young girl, as beautiful as she may be, show us a different version of reality, filled with the implications of suffering. As a result, there is a gravitas that subverts the gleaming attractiveness of the face, making the artwork a study in the brutal implications of whole-scale destruction.

A City-Bred Child, in many ways similar to Boom Boom, consists of a mixed-media, transparency image, again of a girl’s eyes and hair; she too has her lower face covered by an article of clothing. But the upper face this time is composed of bright-green squares?a reenvisioning of the simpler, but just as effective, image we face in Boom Boom.  This small series is not without its visual expressiveness, although it is clear that its content possesses danger. Another piece, Broken Heart, shows an image of a little girl in an acrylic painting that follows an engraving. Done in deepening greens that darken almost to black, Broken Heart is an affecting work of art, whose formal arrangement is organized by a series of lines describing rectangles and squares over the surface of the image. At once a tour de force as a technical exercise and an emotionally compelling image, Broken Heart shows us that the dignity?the spiritual worth?of children remains a strong interest of the artist, taking first place in his artistic focus. As a group the images show us that behind the surface suavity of the pictures there lies a deeper purpose and more serious intention than viewers might initially pick up. This gravity of purpose links Park to Buddhism, its high regard for all forms of life.
As Park points out, his images concern the suffering that occurs in the world. The artist who made the paintings I describe contains them within the confines of his working imagination. Yet the reminder of public disaster remains. The haunting gaze of the young Korean girl acts as a striking reminder of experience, mostly in the moral sense. While it is painful to see a girl’s eyes communicate a holocaust as part of their claim on the viewer, it is nonetheless a demand that we face the actuality of historical experience. No matter the absurdity of finding the mushroom clouds in the eyes of a child, whose countenance after all is a reflection of our own; what matters is that the image is not processed superficially, but rather as a notion of what we are capable of doing, as horrible as it may be.  The realism we come across in Park’s art fills it with a tangible presence, which intimates not only the innocence of children but also the infinitely barbaric violence of the atomic bomb. As a result, Park comes down pretty much on the side of experience, using his imagination to draw attention to facts we would rather not face.

This preference for a close-to-brutal realism shows us that there are still artists who are willing to commit themselves to describing destructive impulses, even as they contrast malevolent events with the haunting blamelessness of youth.  The choice is clear: either we can try to raise our children as the innocents they are, or we can subject them to death and destruction. Art should report on the human condition as objectively as it can?not because it is bound to do so but because it offers us a mirror of infinite variation. Thus, the great range of subjects we treat in art cannot only concern innocence; it must address the violence that is part of life. Aware of ethical culpability, Park presents to us small spectacles of narration that throw light on problems we are all beset with. The conflation of beauty with the bomb is a moral subversion, but one that reflects our own culpability internationally. However honest we may be with ourselves, however moved we may be by what is beautiful, we have to come to grips with our capacity for creating violence. By claiming beauty as an ally, Park sweetens the pill that we all must take. It is not his fault that we remain what we are.

Jonathan Goodman

Jonathan Goodman is a poet and writer based in New York City. His specialty is in writing about contemporary Asian art, for such publications as Sculpture, artcritical.com, and Yishu, a Vancouver-based journal on contemporary Chinese art. He currently teaches contemporary art criticism at Pratt Institute, an art school located in Brooklyn.

Jonathan Goodman

Park, dae cho

M.F.A in Korean Painting major, Graduate school of Art & design Sang-myung University Citation
Present Ph.D. Art & Design Department, Sang-myung University
Selected One Person Exhibitions
2011, Mar An exhibition for Ph.D. of fine art thesis at Gallery Jung
2010, Nov "Purity"( Gallery M)
Oct " Desire" (Gallery Jinsun)
June. ‘Innocence Lost’( Chelsea Art Museum )
Mar. SOAF( solo booth, coex )
Selected Collections
Singapore National Art Museum
Hoseo University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Gyeong-gi Provincial Art Museum
Hanwon Art Museum /City hall of Yongin
The City Hall of Won-ju /
Boseung Green tea Museun / Sang-myung University Museum,
Gallery Won / Gallery Jin sun / Gyeng-hyang Gallery
Gallery Dos / Gallery Jung / Stanza Gallery
A number of corporations and individuals

 

박대조 인터뷰


박대조작가의 작업실은 작가의 작업실이라기엔 너무 럭셔리할 정도로 좋은 환경이랄까? 전시를 앞둔 긴장감이 역력한 박대조작가는 밤샘작업으로 피로가 누적되어있었다. 워낙 다작을 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쉬임없이 전시를 하는 열정 그 자체를 보는 듯하다.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소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단함이 놀라고도 남을만하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눈은 순수함으로 어른들을 정화시킨다. 미소짓고 있는 듯,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듯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어른들의 삶이 비춰진다. 눈동자 속에서 절망과 희망을 담고 있는 박대조작가를 만나보았다.


작품에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을 모델로 삼는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아이들을 모델로 삼아야겠다고 정하고 작품에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표현하는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될 수도 있고 노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제가 재현하고싶은 대상이 어린 아이였고 아이들이 보는 어른들의 세상을 동심의 눈에 투영시켜 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후에 제 어떤 감성이나 말하고 싶은 주제가 변화되면 작품 속 모델이 어른이 될 수도, 스타가 될 수도, 혹은 제3국가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모델로 삼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그동안 제가 나타내고 싶은 것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네팔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에서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순수하기도 한 모습, 혼돈된 모습,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을 닮은 어린아이들의 염원이 궁금했어요. 작품 속 어린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여러 가지 염원이 보여요. 하지만 염원을 모두 드러내진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으로 다양한 감정을 읽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아이들의 눈으로 사회적 문제들을 담아내는 것은 우리가 외면하려는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아이들의 눈동자에 포커스를 맞춘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의 눈은 흔히들 ‘마음의 창’이라고 하죠.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눈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정화시켜줍니다. 저는 이러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어른들의 삶의 리얼리티를 작품을 통해 재현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눈 속에 있다는 말이 있어요.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삶, 아이들이 품고 있는 소망, 염원 등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연예인 이효리를 모델로 한 작품이 있던데 이 작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효리는 유명하기도 유명하고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지만 제가 보는 이효리는 오드리 햅번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의 이효리의 눈 속에는 오드리 햅번이 아프리카에서 어린 아기들을 보살피고 봉사하는 장면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내면과 외면이 합일된,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스타가 진정한 스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창기에는 한국화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작업방식이 바뀌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먹’이라는 게 사람을 빠져들게 합니다. 먹에 빠져들어서 수묵과 채색으로 산수와 풍경을 그리다가 우연히 석판에다 산수와 풍경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면서 대리석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작품의 질을 떠나 작품 자체가 오래도록 남는다면 그것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동굴벽화가 있지 않습니까. 대리석을 이용해 만들면 이처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진과 조각,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작업을 하며 소재도 산수화에서 인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제 작업만이 전부라고,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 자체를 좋아하면서 많은 예술가를 존경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기운을 얻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실에는 제 작품 뿐만 아닌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두고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획은 없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붓을 들고 있던 그렇지 않던 24시간의 삶 자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기에 계속해서 많은 자극과 영감을 받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제 계획입니다.”


박대조작가가 기존의 작업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나가는 삶을 사는 것은 ‘작가의 삶 자체가 작품활동’이라는 그의 말이 삶속에 베어 있기 때문인 듯 싶다. 박대조작가가 시도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 자체로 누구보다 멋진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앞으로 계속 될 작가의 작품이 기대된다.

미술영재교육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미술영재교육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미술영재교육은 예술적인 감각 및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영재성에 적합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잠재적인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로서 역량을 발휘토록 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영재교육 프로그램 개발은 영재의 올바른 평가와 선발이 연계되어야 하며, 프로그램에 참여할 학습자의 수준과 적성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프로그램 개발의 다양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잠재적인 영재성을 파악하고, 그 유형을 분석하여 프로그램 적용을 할 때에는 학습자에 대한 성향과 정보 등을 구축함이 필요하다. 특히 영재교육에서는 다양한 개별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어떤 학생들은 그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알아봄으로써 생각을 탐색하고 발전시키며, 어떤 학생들은 재료와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에 관심이 많고, 어떤 문제에 대해 스스로 탐색하고 흥미 있는 주제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미학적 탐구(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하고 독자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기주도적 학습을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미술영재교육 프로그램의 목적과 내용
 국가적, 개인적 그리고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교육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 미술교육분야에서도 영재교육의 필요성은 절실하다고 본다. 
미술에 특별한 열정과 흥미를 보이는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열정과 자신감이 소멸되지 않도록 지속적이고도 특별한 교육적 배려가 필요하다. 미술 영재들의 특성과 재능이 다름을 인정하고 개별화된 교육을 실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는 체계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기능적인 측면과 기술위주의 입시를 위한 미술 영재 교육이 아니라, 미래 사회에 필요한 자기 주도적인 창의적 능력을 신장시킴으로써 창의적?비판적?철학적 가치관과 심미적 안목을 함양한 21세기 예술가를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내용은 예술과 인간개념을 이해하도록 하여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자신만의 개성 있는 미술의 언어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하고 능력을 계발하고자 한다. 이처럼 재능을 키워주는 것은 결국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영재 교육과정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첫째, 모든 학습자의 최적의 학습속도를 발휘하도록 하며, 둘째, 영재들의 개별 학습 요구에 부합되는 교육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인지적·정의적·사회적·미학적 경험을 복합적으로 제공하는 교육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속진·심화의 통합적인 접근방법에 근거하여 개발된 교육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다섯째,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문서화하고, 실천함으로써 잠재적 성과를 최대한으로 추구해야 한다. 여섯째, 영재교육과정 개발을 지속적 과정으로 인식하여 평가하고, 평가 결과를 반영하여 수정하고 개선해야 한다.

* 미술영재교육프로그램의 개발사례
 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관찰(지각)-탐구(구조화)-표현(재구조화)-평가(성찰)’이다. 그리고 과정중심을 기본적으로 하고, 통합적 성격으로 한 가지의 과정이나 개념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했다. 또 이 요소들은 결합되거나 연속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각 구성요소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관찰’은 대상을 지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시각적 자극 뿐 아니라 오감을 통한 연합적 지각과정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시각적 보기를 중심으로 하되 청각적 ‘들어보기’나 촉각적 ‘만져보기’를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2) 탐구(구조화)는 ‘관찰’의 과정을 통하여 체득한 정보를 주관적 판단에 따라 구조화된 개념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조형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발상의 근원이 된다.
   3) 표현은 보기를 통한 개념이 ‘시각화’된 과정이다. 즉, ‘관찰의 과정’의 측면이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시각적 표현 뿐 아니라 언어에 의한 설명, 몸짓, 표정 등 다양한 의미들의 표출이다.
   4) 평가는 수준을 측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을 충실하게 하는 또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된다. 평가방식으로는 체크리스트, 작업일기, 설문지 질의응답 등 다양한 방법이 활용될 수 있으나, 그 시점은 교육이 끝난 후 보다는 교육의 과정 중에 병렬적으로 진행하도록 계획한다.

 미술영재프로그램의 구성 요소와 내용

● 프로그램1:  미술놀이를 활용한 리더십 함양
 리더십을 빛낸 인물그리기
  리더십은 자율과 책임을 가지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자기 스스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리더십 프로그램은 다양한 생활경험에서 자기규제 및 자기관리 능력, 목표관리 능력 등의 내적인 힘을 배양하여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건강한 사회인과 창의적인 인재를 육성하는데 기여한다.
  첫째로 미술에서 리더십 놀이는 자신과 관련된 다양한 놀이를 포함하고 있어 자아 정체성을 확립시켜 준다.
 둘째로 미술에서 리더십 놀이는 나의 비전, 그에 대한 실현계획을 표현하는 놀이를 포함하고 있어 자기 주도적 능력을 신장시켜 준다. 셋째로 리더십 놀이는 타인과의 관계, 의사소통, 경청과 배려 등에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대인관계 능력을 향상시킨다. 넷째로 리더십 놀이는 공동체 비전을 실현시킨다. 삶 속의 미술, 생활 속 미술을 강조하는 시대에 이러한 미술 놀이를 통하여 삶이 개선되고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으므로 셀프리더십 놀이는 미술에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 프로그램 2:  미술관련 커리어코칭
◎ 활동개요: 이 활동은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 세계를 미술 이론, 회화, 디자인, 서예, 조소, 공예 등 각 분야별로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알맞은 직업을 탐색하여 미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1차시] 미술과 관련된 직업 세계 살펴보기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 세계 알아보기   
[2차시] 나의 적성과 능력 알아 보기 
  미술과 관련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 살펴보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 선택하기
[3차시] 나의 꿈 펼치기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 표현하기

● 프로그램 3  : 드로잉 로봇 만들기

◎ 활동개요
   키네틱 아트는 기존의 정적인 작품과는 달리 동력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작품을 말하며, 최근 현대 미술의 조각이나 설치 작품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미술과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장르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미술을 접목한 또 다른 표현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갈 수 있도록 한다. 이 단원에서는 원심력의 불균형을 이용하여 움직임을 만들어낸 다음 드로잉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1차시] 움직임 탐구
  원심력을 이해하고, 움직임 만들어내기
  로봇 아이디어 스케치하기 
[2차시] 로봇제작하기
  다양한 형태의 로봇 연상하고 재료들을 결합하기
  조형요소와 원리를 이해하고, 창의적인 형태의 로봇제작하기


● 프로그램 4 : 사진과 놀이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고, 상황을 재현하고, 재발견하게 한다. 이 단원에서는 과거의 예술은 원근법을 기초로 해서 고정된 한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을 탈피해 사진기를 이용하여 다양한 탐색 및 창의적인 시각을 부여해 보는 기회를 갖는다. 늘 보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표정과 의미를 생성해내고, 즐겁고 유쾌한 상황을 설정하여 사진기를 이용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찾아내는 기발한 표현 방법으로서의 사진을 되짚어 보자.  
[1차시] 사물 속 표정 찾기
  다양한 일상 속에서 표정 찾기
[2차시] 글자 찾기
  주변을 탐색하며 글자 찾아오기
  글자를 이용한 미술 표현하기
[3차시] 원근 깨트리기
  원근법을 이해하고, 재미있는 상황설정하기
  촬영 및 결과물을 비교하며 소감 발표하기

참 고 문 헌
곽진숙(2005). 수행평가에 함축된 교육의 개념과 가치에 관한 비판적 검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서울특별시 교육청(2005). 중학교 미술영재교육운영 프로그램 및 교수 학습 자료. 서울특별시 교육청,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원 영재교육지원센터.
설원기(2002). 미술원 파운데이션.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정현철, 서혜애, 강민희(2006). 예술영재 교수학습자료 개발 연구. 한국교육개발원.
최성욱, 신기현(1998). 교육평가의 내재성과 외재성. 교육원리연구, 3(1), 39-76.
한수연(2004). 학교과학실험의 교육적 의미에 대한 재고찰. 교육원리연구, 9(1), 47-82.
한수연, 설원기, 윤동구, 곽남신, 안규철, 배진환, Clark, Zimmerman(2008a). 예술영재교육
      프로그램 개발연구(Ⅱ): 시각예술분야. 문화관광부 ·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Berger, J.(1972). Ways of seeing. London: Penguin.
Burnaford, G., Aprill, A., & Weiss, C.(Eds.).(2001). Renaissance in the classroom. Chicago:          Chicago Arts Partnership in Education.
Clark, G. &Zimmerman, E.(2004). Teaching talented art students: Principles and
      practices. New York: Teachers College Press, Columbia University.
Gardner, H.(1993b). The relationship between early giftedness and later                  achievement. In   G. Bock & A. Ackrill(Eds),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gh ability.(pp. 175-182).New York: Wiley.

Andy Denzler


▲The Way to the River, 2012, oil on canvas, 150 x 150 cm
▲No Mans Land lll, 2010, oil on canvas, 150 x 200 cm
덴즐러의 작품은 꾸밈이 없어, 약간은 거칠고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품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요소는 각각의 맡은 역할을 실행하고 있다. 수평으로 흐릿하게 왜곡된 이미지, 수직으로 두꺼운 재료를 이용한 추상부분, 붉은 계열과 무채색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그림 이야기가 있다. 기억과 관찰이라는 개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물론, 차용(가져다 씀)과 작가 특유의 회화적 테크닉을 조합해서, 지각의 확신에 대해 의문(지각한 것이 틀림없는지)을 제기한다.

▲Watchdog, 2011, oil on canvas, 200 x 300 cm (2parts)
/ THE HUMAN NATURE PROJECT
Nadine Brüggebors
No Man’s Land. True Faith. Berlin 1968. The Hunted Garden. The titles that Andy Denzler gives his paintings might also have been taken from films, poems, or pieces of music that resonate softly when the images are viewed. Beyond the visual experience, the paintings open up further fields of association without specifying strict terms of reference. Denzler’s painterly oeuvre, which is conceptually structured in series, encompasses subjects of relevance both personally as well as to society. Thus, his body of work ranges from those that are politically motivated such as the American Paintings (2005),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Bush government, to the poetic transposition of beach studies, entitled A Day at the Shore (2006). In the portrait-like paintings of the Insomnia series (2007), Denzler visualizes the psychological and physical effects of a society that applauds continuous activity and a constant willingness to perform. In parallel to these works, which are created for individual exhibitions, Denzler also creates portraits on an ongoing basis. These depict celebrities such as Kurt Cobain and Barack Obama, but also friends of the artist or images of unknown individuals found on the Internet or in the press. As a result of the artist’s smudging technique, the portraits are also reminiscent of film stills and video images that have been halted for a fraction of a second. The Human Nature Project (2010) can be seen as a consistent continuation and broadening of the content of his work up to this point. The series expands on the central question of human nature and how it is positioned in society and the environment, a theme that Denzler has continued to explore in new ways since turning from abstract to figurative painting. The Human Nature Project question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uman figure and nature within the tension that exists between the artistic poles of figuration and abstraction, color and mono chrome, perception and imagination. The title of the series of paintings can thus be interpreted in a twofold manner: on the one hand, as an investig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nature and on the other hand as an examination of the essential nature of humankind itself. This ambivalence is intrinsic to the images: the figures are allotted much more space in the landscape than if they were simply staffage, but as the paintings rarely exhibit individual, portrait-like characteristics, it is instead the landscape that evokes atmosphere and emotion.
In the painting Waterfall Crossing (2012), the female figure already takes in a constitutive role as a result of her central position in the composition. Striding to the left, she holds her head lowered. The direction of her gaze might be presumed from the title: the white area that takes on a darker tinge toward the left hints at a waterfall whose cascading masses of water are supplemented by the viewer’s imagination. Standing in the middle of the composition, the figure divides the image into light and dark sections, into landscape elements denoting tranquility and those that evoke motion. The female figure is not a natural part of the landscape but instead seems to be uprooted and does not belong to the place. We learn neither more precise details about the topography or temporal framework nor about what has brought the figure to this place. She stands on the border between two worlds, undecided about whether and in which direction she will go. The question of what decisions she will make remains open. The images in the Human Nature Project do not strive to communicate any certainties but rather raise questions about the fundamental relationship of humankind to the landscape. What significance does the natural landscape have for human nature? What impact does the landscape have on humankind and how does humankind find its place in the landscape? How does humankind relate to nature? Questions such
as these are not forced by the paintings but posed subtly and only become manifest upon close reading. Nonetheless, it is the beauty of nature and its aesthetic effect that are in the foreground of the motifs and not the interventions in nature undertaken by humankind, with all their consequences, as they are constantly presented to us in the media.
Working in series offers Andy Denzler the possibility to address these existential questions in new ways again and again. The basis for his works comprises his own photographs as well as images found in the press, in films, and on the Internet and then processed digitally. It is occasionally possible to recognize concrete source materials, for instance images borrowed from Robert Altman’s film Short Cuts (1993), or reminiscences from art history. This subjective utilization of motifs from the history of art, film, and images should not be understood as an attempt at modifications of canonical role models. Through the selection of detail, the alienation of perspective, and free painterly realization, Denzler conceptualizes his
own world of images. In doing so, the artist is not so much a narrator who prescribes a structured story with a beginning and an end, but rather that the images search for viewers who bring their own experiences and cultural and psychological imprinting, and thus shape the images into a new, individually devised story. In this sense, Denzler’s multilayered work is to be understood as a reflection on classical concepts of genre and techniques of art and media history. The artist tales advantage of these concepts and techniques and imultaneously questions them through testing established borders, for example through the use of modern image processing techniques in the medium of oil painting, a form understood entirely as a manual technique.
Denzler’s painting technique, which he has developed and refined over years,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phenomena of motion, time, and perception. When reading the image, the viewer comprehends the work process layer by layer: the step-by-step application, the smoothing, spreading, and smudging of paint. The eye wanders over smooth sections of smudged oil paint, lingers at points where underlying layers are exposed, and penetrates the surface to the deeper layers of paint. The colors are first applied brushstroke by brushstroke and then drawn with a squeegee, in most cases horizontally, across the entire breadth of the canvas. By means of this final dispersion, the paint masses are combined into intermediate shades, and areas that define the subjects of the image are created. This method presupposes the artist’s ability to anticipate the result during the act of underpainting. The entire surface of the image, however, is not smudged: bands that structure the image formally and lead the attention of the viewer to what is “underneath” often remain. The work process itself is a race against time as a result of the wet-on-wet
technique described and requires rapid action on response to the drying process. The painting thus also aims to visualize the act of becoming and to serve as an image in which it remains possible to experience the artistic process of creation. With his paintings’ blurred contours, Denzler addresses the question of perception. Without being able to acquire certainty about the appearance of the subjects of the image, the viewer’s eye sharpens the outlines and shapes the areas individually into familiar forms. The existence of the objects of the image is the result of subjective comprehension. The technique and content of the image supplement each other as they aim at the same pictorial statement. The fact that the backgrounds cannot, for the most part, be defined, that it is not clear which landscapes,
which trees, or which lakes are involved, results from the high degree of abstraction. In the painting The Orange Hues of Heaven (2010), three geometric surfaces that are nuanced only in color and whose finished surfaces can hardly be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define the planes of earth, water, and heaven. A thin line indicates the horizon. An effect of depth arises above all from the presence of two archaic-seeming figures in the image. What is addressed here is not so much the relationship between figure and nature, but rather how the landscape serves as a setting for human interaction whose content Is not clearly evealed to the viewer. The shadows that are cast in The Orange Hues of Heaven, pointing to a light source outside of the image, are striking. The reddish-beige hue conveys a warm tmosphere
and invokes the earth of South Africa, where Denzler lived for one year in his youth. This earthy tonality characterizes many of his works of the 1990s, and the high degree of abstraction of the landscape calls to mind Denzler’s early work in which he intensively explored the painting of the Abstract Expressionists and the Zurich Concretists in order to examine the balanced distribution of areas, the phenomenon of the golden ratio,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color and form. In the series Urban Figures (2009), Denzler Takes up abstract compositions anew and transforms them into a stage for his figures, which are mostly portrayed from the back.
The Human Nature Project series includes a sequence of monochrome works reminiscent of grisaille, the painting form whose gray “chromaticity” is achieved exclusively by tonal gradations of black and white.
On closer examination, it becomes clear, however, that Denzler’s works are in no way black-and-white paintings. His shades of gray build on individual chromatic undertones such as sepia, eggplant, and olive, or contain numerous additional shades of color ranging from brown to orange to blue. An elegant monochrome, the sepia hue in which the painting No Man’s Land I (2009) is immersed call to mind old photographs yellowed slightly by sunlight. The painting could be a lighthearted childhood memory of days in nature: the lakeside as destination for summer excursions, climbing in the trees on the shore, diving in and enjoying hours in water that is never too cold, losing oneself in play: moments when one is at one with oneself, with time, and with space. No Man’s Land: is it a land that belongs to no one
because it is fictitious, past, or a dreamscape? Denzler’s images also call to mind film stills, sequences that seem to have been taken from a larger narrative connection. The moving images in a film are created through the rapid succession of static single images. As a result of the sluggishness of the eye, these are not seen separately but perceived instead as filmic motion. Because of his technique, in some of his particularly impressionistic images, Denzler succeeds in evoking movements in nature such as the wind rushing, water flowing or the light of the sun glistening on the seashore. For example, in the painting Floating Stones (2010), a viewer may perceive water Flowing around stones, or, as in Across the Shallow Stream (2010), the wind literally caressing a female figure. Like in Floating Stones, the heads of the mostly isolated figures are positioned on the horizon line, which aids spatial orientation and can simultaneously be interpreted as a motif of yearning and of freedom. Denzler’s landscapes are thus spaces of projection: they prompt viewers to call up their own moods and memories and to question them. Depending on the choice of colors and subject,
they can trigger exhilaration and confidence, but they can also unsettle and weigh the viewer down with their indefinite openness to interpretation.
With his Mythenquai works created in 2010, the artist designs modern images of history that avail themselves of the traditional vocabulary of heroic landscapes. The title of the painting refers to the lakeshore promenade in Zurich of the same name. Denzler thereby gives the viewer reason to expect the depiction of an urban landscape and at the same time elicits thoughts of ancient myths, of its heroes and their yearning for distant places. Although compositional schemes or individual figures might call to mind traditional pictorial formulas, these paintings cannot, nonetheless, be decoded unambiguously. Denzler does not narrate predefined stories nor present any concrete events. He instead offers snapshots in time
of a possible narrative. It is not images that have been hand down that serve as his source material, but rather self-stages photographs: Denzler visited the location with actors who posed according to the artist’s instructions. The artist thus acts as director and as a creator of new myths. The title Mythenquai I (death of Actaeon) alludes to an episode from Ovid’s Metamorphoses in which the hunter Actaeon observes the Goddess Diana while she is bathing, is transformed by her into a stag for this offence, and is subsequently killed by his hounds. In its dramatic pictorial sensibility and painterly treatment, Denzler’s painting might be compared to Titian’s Death of Actaeon: both artists model the subjects of their images not based on contour but on the paint, Titian classically with the brush, Denzler through smudging with the squeegee. The broken coloring in Denzler’s rendering is reminiscent of the Venetian master as well. Differences become clear above all in the handling of the literary source material: while Titian conclusively interprets Actaeon’s fate, Denzler’s painting formulates conundrums that do not allow the action depicted and the literary convention referred to in the title to be reconciled unambiguously. Denzler’s recourse to Ovid’s poem and Titian’s painting seem to be important insofar as he takes up the ideas of transformation and relates it to how such traditions are handled in general. The other images in the series also raise questions. What story might be taking place in the painting Mythenquai II ? Like in depictions of the Deposition of Christ, a male figure with a bowed head lies in the supporting arms of a second man. Before a gray sky, the two standing figures gaze in opposite  directions: are they questioning, waiting for help, or existential themes such as the search for meaning, solitude, forlornness, and paralysis. The painting Mythenquai III evokes similar thoughts but also elicits images and memories of the young rebels of the young rebels of the American cinema of the 1950s: Marlon Brando and James Dean, for instance, and the lack of direction of a misunderstood youth. In Denzler’s paintings, what is expressed is an entirely personal perspective on topics that concern the individual as well as society. The images serve as open offers to viewers to pause and appreciate the pictorial world with a slower gaze in order to examine themselves and question their own positions. Denzler’s paintings are sensitive descriptions of fragile states. They do not remain on the surface but rather penetrate the physiognomy of the landscape, the depths of society, and the inner psychological state of humankind, and in doing so, turn what is innermost inside out in a fragmented and vulnerable manner. And yet a touching and hopeful lightness frequently inheres to Denzler’s images despite all the existential themes and the not infrequent serious undertones, as the viewer is made aware that they are also an expression of a reality that finds itself in constant flux.
Andy Denzler
1965 Born in Zurich/ Switzerland
1981 Kunstgewerbeschule, Zurich/ Switzerland
1998 Member of visarte.bvk
1999 F&F Schule fur Gestaltung, Zurich/ Switzerland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USA
2000 Art Center of Design, Pasadena/ USA
2006 Master of Fine Arts, Chelsea College of Art and Design, London/ UK
Lives and works in Zurich/ Switz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