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5, 2011

Joung, Bo kyung















정보경의 회화



욕망의 꽃, 회화의 꽃, 존재의 꽃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그림을 그릴 때 머리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주지주의), 손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도구주의), 가슴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다(주정주의). 대개는 머리와 손과 가슴이 상호작용하고 상호 간섭하는 편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경향성을 편의상 이렇게 구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태도와 방법 각각은 현대미술과 관련한 나름의 축을 발전시켜왔는데, 주지주의와 개념미술(철학적인), 주정주의와 표현주의 미술(감각적인), 그리고 도구주의가 사실주의와 극사실주의 미술(재현적인)과 관련이 깊다.

이 가운데 정보경의 그림은 한눈에도 주정주의를,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경향성을 체질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 같다. 체질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정신보다 몸이 먼저 받아들이는 식의 다분히 자동기술적인 습성과 습생의 생리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주지주의가 화가와 세계와의 분리(세계의 객관적 분리와 대상화)에 바탕을 둔다면, 주정주의에서 화가는 세계와 하나로 연동(세계의 주관화)돼 있다. 내가 들뜨면 세계도 환해지고, 내가 우울하면 세계도 빛을 잃는다.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며, 세계를 집어삼켜 내면화하고 그렇게 내면화된 세계를 재차 뱉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뱉어낸다는 표현은 표현주의의 용어 자체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데, 원래 속에 있던 것을 밖으로 게워낸다는 의미이며, 주관적인 내면세계를 객관적인 외계에 대질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외계를 모티브로 한 만큼 외계를 닮았으되 외계 그대로를 재현한 것은 아닌, 차라리 외계에 대한 주관적 반응을 기록한, 어쩌면 외계가 주관에 종속적인, 외계와 주체가 상호작용하고 상호 간섭하는 심리적(혹 심층적)이고 미학적인 어떤 지점이 생성되고 기입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그리기를 몸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가슴으로 그린다는 말은 결국 몸으로 그린다는 말이다).

실제로 정보경은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곧잘 배설(뱉어내기 곧 표현주의적 분출을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하는)과 카타르시스에 연결시킨다.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마구 발산하는 것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감각적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결국 관건은 작가의 희열이 우리의 희열이 될 수 있느냐는(작가를 넘쳐 우리에게까지 건너와지느냐는) 공감(감각적 범람)의 문제이며, 이렇듯 공감하는 바가 없을 때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그저 한 개인의 무분별하고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작가의 희열은 우리의 희열로 파열되고 확장되는 것 같다.

여기서 핵심은 희열인데, 희열은 카타르시스에서 왔고, 주지하다시피 카타르시스를 최초로 정식화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어느 정도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스와, 그리고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와도 통한다). 원래 카타르시스는 의학용어로서 설사를 의미했다. 몸을 불편하게 하던 것이 설사를 통해 배설되면서 가뿐해진다. 마찬가지로 정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 정신을 어지럽히고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설사를 통해 배설되면서 해맑아진다. 몸도 마음도 배설될 것은 배설되어져야 한다. 배설되어야 할 것들이 배설되지 못하면 병이 된다(정신적인 배설마저 몸의 생리와 습성에서 찾은 것에서 엿볼 수 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결국 인간이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유물론적임을 밝힌 것으로서, 그 자체가 플라톤의 관념론적 인간학에 비교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설되어져야 할 것은 작가에게서 다름 아닌 끼이며, 에너지이다(그리고 동양학에서의 기). 그리고 특히 내적 에너지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욕망으로서, 사람들에 따라서는 특히 성적 리비도를 욕동으로 해석해 욕망과 구분하기도 한다)에 해당하며, 작가는 공교롭게도 욕망이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써(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욕망의 꽃으로 명명한다) 그 상관관계에 신빙성과 함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주정주의와 표현주의, 배설과 카타르시스를 통한 끼와 내적 에너지의 발산, 그리고 욕망의 자동 기술적이고 무분별한 분출이 소위 몸적인 그리기를 매개로 서로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고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이런 몸적인 그리기는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에서 특이한 점은 일체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스케치나 에스키스 과정이 없다는 점이다. 대개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곧장 텅 빈 캔버스 속으로 육박해가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림의 형식이나 의미내용에 대해서 숙고하는 과정이 전무하지는 않을 것인데, 다만 그 숙고가 철저하게 작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점이 다르다. 그렇게 작가의 마음속 구상이나 응결된 에너지가 곧장 캔버스에 옮겨지는 것인 만큼 자동 기술적이고, 즉흥적이고, 우연적이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측불허적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날 것의 느낌 그대로를, 마치 자기가 오롯이 옮겨진 것 같은 느낌 그대로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질러놓고 보면 그 다음 과정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데, 자동 기술적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를테면 색이 색을 부르고, 형태가 형태를 부르고, 의미가 내용을 불러들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캔버스 속으로 호출된 다른 색, 다른 형태, 다른 의미 내용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때로는 그림의 형태가 덧붙여지고, 그리고 더러는 처음의 형태가 지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가 자신이지만, 더불어 어느 정도는 그림 자체의 내재적인 생리가 그림을 그려나가도록 반쯤은 방기하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소위 감각적인 그리기, 몸적인 그리기가 수행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즉흥성과 우연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정 정도의 예측불가능성이 작가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역동성과 생명력, 그리고 생명에 대한 찬미와 환희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작가의 그림은 그림 속에 작가 자신이 고스란히 투사되는 과정인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존재의 확인이며 생명(삶)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그림은 말하자면 그 표상에 걸 맞는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림 속에서 발견되는 즉흥성과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은 그대로 그림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지으면서, 동시에 작가의 자기 정체성을 결정짓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그대로 존재의 흔적인 것이며, 자신의 생체리듬이 기록되는 일종의 생리적 등기부에 해당한다.

순간순간(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생리가 기록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들뜨고 우울한, 빠르고 느린, 느슨하거나 강밀도가 높은, 긴장되거나 맥이 풀린, 날아갈 것 같고 다운된 듯한 온갖 이질적인 느낌의 지점 지점들이 낱낱이 기록된 일종의 생체지도 내지는 생리지도를 예시해주는 한편, 심리적인(혹 생물적인) 회화의 새로운 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림이 이처럼 생리의 표상이면서 느낌의 메타포로서 의미 기능하는 것인 만큼,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특정 소재가 갖는 의미가 결정적이지는 않다. 이를테면 전작에서의 자화상이나 실내 공간 정경, 그리고 근작에서의 꽃이 갖는 의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말하자면 이 소재들이 갖는 재현적인 의미는 사실은 생리의 질 속에 녹아들고, 느낌의 강도와 더불어 해체돼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룬다. 그럼으로써 소재가 회화에 회화가 존재에 각각 종속되는 경우로 보이고, 따라서 종래에는 이 모든 소재들이 존재의 메타포로 모아지는 경우로 보인다. 이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은 생리의 기록이며 존재의 흔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치 리허설이 없는 삶처럼 캔버스를 대하고 싶다. 나에게 캔버스는 질료와 이미지와 내가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이며,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이미 결정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거나 재확인하는 그리기가 아니라, 매순간이 새로운 시작의 개시이며 연속인 그리기는 분명 힘겹고 가슴 벅찬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그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순간에 에너지를 다 써버릴 수가 있다면 그 그리기는 얼마나 찬란한 그리기가 될 것인가. 작가의 그림은 그런 그림 그리기의 처녀지에로 초대한다.



Joung, Bo kyung (Kaylin Joung)

1982 Born in Seoul

Education

2010 a Master's degree in progress Dept. of Painting at Hongik University, Seoul, Korea

2008 Hongik University, B.F.A, Dept. of Painting, Seoul, Korea

Solo Exhibiton

2011.8 invitation solo exhibition by gallery K (Gallery K, Seoul)

2010 KCAF -Korean Contemporary Art Festival (HAGARAM Art Museum, Seoul)

2009 Joung, Bo kyung solo exhibition ((Contemporary Art Museum in Hongik University, Seoul)

2008 Bloom (Gallery Gac, Seoul)

Selected Group Exhibition

2011 SEOUL ART FASTIVAL (Ritzcarlton Hotel, Seoul)

2011 HAPPY ART (Gallery H, Seoul)

2011 AND...TOGETHER (Jean Art Center, Seoul)

2010 Happy bowl (Gong Art Space, Seoul)

Contact me

c.p:+82 01 6757 5035 t:+82 2 971 5035

kaylinjoung@gmail.com www.kaylin.co.kr

정 보 경

1982 서울 출생

학력

2010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수료

2008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졸업

개인전

2011.8. 갤러리K 청년작가 초대전 (갤러리K, 서울)

2010 KCAF 아트페어 (한가람미술관, 서울)

2009 정보경 개인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08 피어나다 (갤러리 각, 서울)

주요 단체전

2011 SAF 서울아트페스티벌 (리츠칼튼호텔, 서울)

2011 HAPPY ART-행복한 리빙룸 (갤러리H, 서울)

2011 AND...TOGETHER (진화랑, 서울)

2010 행복한 그릇전 (공아트스페이스, 서울)

c.p: 010 6757 5035 t:02 971 5035

kaylinjoung@gmail.com www.kaylin.co.kr

studio:139-801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312-4번지 우성빌딩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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