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19,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 웅섭이 형과 나

▲필자가 유년시절에 흑백 사진 뒷면에 그린 사촌형의 모습

▲대학 시절에 승마를 하는 사촌형 윤웅섭의 모습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웅섭이 형과 나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골 큰 집의 부엌방은 사색과 독서를 하는 공간이었다.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사촌 형의 서재인 그 방에는 책이 가득했다. 사촌 형은 사방을 온통 선반으로 두르고 법학, 철학, 문학, 사회학, 경제학, 예술 등 다방면의 책들을 꽂아놓았다. 나는 어떤 책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읽었다. 그러나 훗날 내가 깨달은 사실은 그것들이 나의 사유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만일 나의 삶에서 이 시기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사촌형인 윤웅섭과 나의 나이 차이는 열 세 살이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형은 대학에 다녔다. 그런 나이 차 때문에 내가 중학생일 때 형이 보던 책을 큰댁의 부엌방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렵엔 형은 이미 대학을 오래 전에 졸업하고 취직을 위해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형의 서재는 나의 좋은 공부방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그래서 6학년 때는 밤늦도록 학교에서 입시공부를 했다. 담임선생님은 하루에 두 번씩 천안에서 배달된 문제지로 시험을 치며 가혹하리만치 공부를 시켰다. 그 덕택에 평택중학교에 전체 차석으로 합격을 했다. 입학을 하고 보니 나는 성적순으로 58명을 끊어 배정한 특별반에 편성되었다. 전체 반은 6반까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내 키는 큰 편이어서 맨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평택중학교는 고등학교와 같이 있었다. 인문과를 비롯해서 상과, 기계과, 화공과, 건축과, 전기과, 농과, 가정과가 있는 종합고등학교였다. 이 학교에는 중학교 삼학년인 내 바로 위의 형과 고등학교 이학년인 사촌형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어머니를 따라 예술제와 운동회를 겸한 축제에 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학교가 전혀 생소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때 예술제에서 본 미술 전시회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평택중학교를 지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입학을 하자마자 곧 바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쓰다 버린 목탄으로 석고상을 그렸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했다. 당시 미술반 선배들은 짙은 감청색 종이를 바른 화판에 나무로 만든 박스, 야외용 이젤 등을 들고 다녔는데 내 눈에는 그게 몹시 부러웠다. 그래서 이학년 때 아버지를 졸라 천안으로 가서 화구를 구입했다. 이젤과 화판, 박스를 한 아름 안고 걸어가는데, 동네 청년들이 일을 하다 말고 쳐다보며 “그게 측량기냐?”고 물었다. 그 무렵 사춘기를 맞은 나는 마음이 들떠 공부보다는 박스를 들고 야외로 다니며 사생을 하거나 멋을 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중학시절의 일탈에 대해서는 <창의력이란 무엇인가-윤진섭과의 대화>(전경원 교수 저, 신원, 2008) 에서 소상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 단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래도 독서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독서는 입학 후 두 해를 신나게 놀고 나서인 삼학년 신학기에 들어서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성적이 완전히 바닥을 쳐서 전체에서 삼분의 일 이하로 밀려있었다. 책만 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도서실에서 <소공녀>부터 읽기 시작했다. 진도는 매우 빨리 나갔다. 한 달 후 박종화의 대하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잡았을 때는 어느 정도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이미 물 건너 간 듯 보였다. 담임선생은 인문계는 어림없으니 농과나 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느니 차라리 서울 가서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다. 마침 반 친구 중에 삼촌이 만화가인 친구가 있어서 서울로 달아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사촌형이 이천의 시골 작은 학교에 영어교사로 있었다. 형은 아버지의 승락을 얻어 나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천의 경남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 학교는 농과와 상과를 합쳐 모두 50명인 남녀공학의 작은 학교였다. 이천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와 유지광의 고향이다. 실제로 그곳에 가서 보니 학교가 있는 금당리에는 자유당 때 이정재가 지어준 공회당이 있었다. 또한 남노당원이던 이주하의 고향인 장천리가 학교와 지척에 있었다. 김삼룡과 함께 유명한 남노당원인 이주하는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틈바구니에서 활약한 김일성 수하의 공산당 수괴였다. 이천은 도자기와 쌀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그런 역사도 지니고 있다. 80년에 초반, 자유당 시절 날리던 주먹계의 거두 유지광이 이천에서 죽었는데 전국의 건달 수백 명이 모여든 곳이다. 그런 곳이 내가 일년 뒤 수원의 수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머물 곳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사촌 형을 따라 처음 이천에 가던 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다음 날이었다. 죽산 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리니 눈이 하얗게 덮인 천지에 키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가득했는데, 그 주변을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떠돌며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순간, 나는 박종화의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읽은 강계를 떠올렸다. 송강 정철이 ‘위리안치(집의 주변을 가시나무로 둘러쳐 바깥출입을 못 하도록 하는 것)’라는 참혹한 형벌을 당하고 추운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장면이었다.
죽산 삼거리에서 길의 한 복판에 서니 한 쪽은 장호원, 한 쪽은 이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몸을 놀일 겸 쉬려고 들어간 이발소 벽에 웬 뚱뚱한 사람이 박사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알고 보니 당시 권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당시 그는 그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이천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련선생은 사람 좋기로 유명한 예비역 대위였다. 나중에 사촌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차지철과 군대 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대위 계급을 끝으로 굴곡 없이 평탄한 군대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했다. 반면, 차지철은 승승장구의 출세가도를 달려 10여 년 뒤에는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죽는 비운의 인물이 된다. 그 둘이 한 공간에서 있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국회위원 선거 유세가 우리 학교 교정에서 열렸는데, 차지철이 재선을 위해 선거 유세차 들린 것이다. 그러나 마침 비가 왔기 때문에 교련 수업을 교실에서 해야 했고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 10. 26사태 때 나는 군대생활을 했는데, 그 때 이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긴 적이 있다.

사촌형은 방학 때면 시골에 내려왔다. 유난히 흰 피부에 미남인 형은 구렛나루를 멋지게 길렀다. 그런 형을 볼 때 마다 나는 구렛나루 수염이 시커면 인기 레슬러 장영철을 생각했다. 장영철은 나중에 "레슬링은 쑈다"라고 커밍아웃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장영철 다음에 부상한 사람이 박치기 왕 김일이다. 이들은 당시 코흘리개 꼬마들의 우상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대홍리에 사는 같은 반 친구 이홍수와 함께 레슬링을 보러 성환에 간 적이 있다. 텔레비전이 귀했던 당시 레슬링 중계는 만화가게에서 돈을 주고 봤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느 겨울 날, 우리는 십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성환 읍내 초입에 있는 만화가계에 갔다. 그런데 간 날이 장날이라고 레슬링 중계가 없었다. 이홍수가 잘 못 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만화만 보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이때 텔레비전 수상기를 처음 봤다. 그때가 아마 63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 동네에 도수 높은 검정 테 안경에 머리를 길게 기른 중년의 아저씨가 이웃집에 세를 살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시골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이0옥 선생의 부군이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어보였다. 가끔씩 정장을 하고 출타를 할 뿐이었다. 이 선생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딸이 나의 초등학교 일년 선배고 아들이 한 학년 아래였다. 그 집에는 열대여섯 살 된 집안일을 거드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는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에 다니는 사촌형과 무슨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기도 했다. 사촌형에게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일정 때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수재인데 사상문제로 붉은 줄이 가 취직을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마을의 앞동산 자락 밑에 있는 외딴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나와 친구들이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올라와서 직접 크레용을 쥐고 그려 주기도 했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름만 대만 알 만한 한 원로 소설가의 전 애인이었고, 그 소설가의 부친이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였다. 그런 인재가 어떻게 하여 외진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 오게 되었는가?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참 희한하게도 여러 면에서 희귀한 근대를 체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아, 역사의 아이러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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