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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1, 2013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상장에 얽힌 추억
이 사진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천안에서 열린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해 받은 상장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년시절 나의 그림 솜씨를 인증해 주는 증거다. 나는 유독 상상화를 좋아했는데 선생님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동네 풍경을 그리러 반 친구들과 함께 가던 일이다. 예쁜 여자 담임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고 걸어가셨다. 어린 생각에 그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때 동산에서 시골 동네를 굽어보며 그린 그림이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상장을 눈여겨보시라. 명칭이 '종합 기능 실기'인 것이 재미있다. 아마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은 기능이라는 인식이 강했나 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천원군(현재 천안시)이 주최한 미술 실기대회에서 당당히 입선을 해 군수가 상장을 주었다. 상상화부에 참가를 했는데 그림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시 내가 사는 성환면 수향리에서 군청 소재지인 천안을 가려면 버스를 타야했다. 버스를 타는 일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었다.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타박타박 걸어서 갔다. 인솔 선생님과 고학년 형들하고 걸어간 기억이 난다.
나에게 천안은 대처였다. 시내에는 4-5층짜리 높은 빌딩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양옥집들이 즐비했다. 시발택시나 버스, 트럭들이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지나갔다. 그런데 내겐 휘발유 타는 그 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도시 풍경이라든지 차량 따위는 내가 '현대성(modernity)'을 체험한 첫 기억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내게 편리함과 속도로 다가왔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야말로 모던 문명의 특징이 아닌가.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농촌의 시골마을은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 동네 한 가운데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물 앞마당에서는 추석 같은 명절 때면 영락없이 춤판이 벌어지곤 했다. 큰 형 또래의 남자들이 치마저고리로 여장을 하고 춤을 추었다. 그것이 남사당패였는지는 지금도 판단이 잘 안 서지만, 두레패들이 장고라든지 소고, 꽹가리를 치며 법고를 돌렸다. 법고의 끝에 달려있는 흰 창호지가 길게 원을 그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리조합 뜰로 가는 길 중간에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상여라든지 꽃가마와 같은 동네 공동의 비품들이 들어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달걀귀신 이야기를 자주 들은 탓에 깜깜한 밤이면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낮에 지나가기에도 왠지 으스스했기 때문에 어쩌다 물고기를 잡으러 수리조합 뜰로 갈 때는 재빨리 뛰어서 갔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 한 군인 아저씨가 사랑방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퇴근길에 내게 비과를 사다주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나지막한 구릉 너머의 부대에 다녔기 때문에 아저씨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집 밖에 나가 구릉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아저씨는 구릉 저 멀리서 하나의 점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저씨를 다른 사람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국방색 옷이 검은 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옷은 그 당시 시골사람이 즐겨 입던 흰옷과 쉽게 구별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기다린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한 줌의 달콤한 비과였던 것 같다.
가끔씩 경부선 철도와 1호선 국도를 바라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나는 동구 밖에 서서 경부선 철도와 1호선 국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멀리서 보면 국도 위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차들이 가로수 사이로 재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었지만 국도 너머로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느리게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어느 날에는 달리는 기관차 지붕 위에 하얗게 사람들이 앉아있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50년대 후반, 그 때는 피난시절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기관차의 지붕에 앉아 갔는지 나는 지금도 그 게 궁금하다. 아마 추석 무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훗날, 내가 미술대학에 다닐 때 수화 김환기의 <피난열차>를 보며 어렸을 적에 본, 흰 옷 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붙어있던 그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장면은 나의 기억에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하얀 적삼 밑으로 가슴을 드러내고 다녔다. 큰 젖도 있었고 작은 젖도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동네 아저씨들도 눈여겨보는 것 같지 않았다. 재작년에 행위예술가 문재선이 주관하는 [Pan Asia] 퍼포먼스 페스티벌에서 왕치라는 예명으로 퍼포먼스를 하면서 나는 넥타이를 한 아름 들고 나와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어렸을 때 본 여자들 젖이 수십 개는 될 것이라며 익살을 떨었다.
그 무렵 시골동네에는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설극장이 자주 들어왔다. 어느 날 확성기에서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같은 노래 소리가 들리면 가설극장이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동네 앞 수리조합 뜰에서 미역을 감던 우리는 기쁜 마음에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가설극장이 들어선 학교 쪽으로 냅다 달렸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오인의 해병', '마부' 등등을 본 기억이 난다. 장동휘, 최무룡, 황해는 아이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장동이, 최무령’ 하고 배우들 이름을 친구 부르듯 하며 아이들은 미역을 감으러 가는 도중에도 영화 본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초등학교 때에는 자연이 곧 교과서였다. 우리는 들판을 쏘다니며 여름에는 참외서리를 하거나 수박으로 수구(水球)를 하면서 냇물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다. 헤엄을 치다 싫증이 나면 물고기를 잡았다. 안양리 아이들은 안성천이 가까웠기 때문에 물고기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물고기는 종류에 따라 잡는 법이 다 달랐다. 모래무지, 미꾸라지, 송사리, 메기, 가물치, 불거지, 뱀장어 등등 고기잡이는 모두 물고기의 생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거지는 몸에서 무지개 빛이 났는데, 날렵하게 생긴 그 놈은 성질이 급해 잡아놓으면 금방 죽었다. 나는 알록달록한 색깔 때문에 그 놈을 유독 좋아했다. 그 외에도 들판에 아이들의 놀이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봄에는 개구리를 잡아 즉석에서 구워먹었고, 여름에는 천렵과 함께 쇠풀을 뜯기며 메뚜기를 잡았다. 긴 강아지풀에 메뚜기를 꿰어 집에 돌아와 짚불에 구워먹었다. 가을에는 콩서리가 그만이었는데 이 모두는 아이들의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한 일종의 건강식이었다.
깜깜한 여름날 밤, 옥수수 밭에서 풍뎅이를 잡거나 건전지를 들고 뒷동산 숲 속에 들어가 참나무에 붙은 장수하늘소와 사슴벌레를 잡는 일도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곤충채집을 여름 방학 숙제로 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무사항이기도 했다. 장수하늘소나 사슴벌레는 참나무에 잘 서식했다. 깜깜한 밤중에 참나무의 굵은 나무둥치 위로 건전지 불을 비추면 그놈들은 꼼짝 않고 쥐 죽은 듯이 있었다. 우리는 그놈들을 잡아다 싸움을 붙이곤 했다.
뱁새 길들이기는 또 어떤가. 참새나 물총새, 종달새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뱁새는 쉬웠다. 그놈은 달아나지도 않았다. 검지 두 개를 번갈아 가며 움직이면 뱁새는 재빠르게 두 발을 바꿔 손가락 위로 기어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참새집이 있었다. 초가는 서까래 사이에 진흙을 채워 넣은 뒤 이엉을 올렸는데, 오래된 처마 밑의 진흙더미에는 자연이 구멍이 생겼다. 거기에 참새들은 알을 낳고 새끼를 깠다. 참새가 먹이를 입에 물고 구멍 속을 드나들면 새끼가 있다는 신호였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사다리 위로 올라가 구멍 속에 손을 넣었다. 그때 손에 잡힌 따뜻하고 물컹한 새끼 참새의 촉감이라니!
처마에서 고드름이 녹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한 겨울의 대낮에는 아이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자치기를 했다. 마당에 참하게 생긴 고구마 모양으로 구멍을 파고 홈 앞쪽에 양끝을 뾰족하게 깍은 새끼 막대기를 걸쳐놓고 운동회에서 릴레이 계주할 때 쓰는 바통 모양의 나무로 쳐서 멀리 쳐내는 것이 자치기다. 그것은 야구와 비슷한 규칙을 가진 경기였다. 자치기에는 여러 놀이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멀리 달리기였다. 그것은 새끼 막대기를 쳐서 손에 받아 무한정 달리는 놀이였다. 상대편이 좇아가 몸에 터치를 하면 지는 경기였다. 그러나 달리는 아이가 새끼 막대기를 놓으면 달린 거리를 재야했기 때문에 발 빠른 아이가 최고로 인기가 좋았다. 자치기가 시들해지면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만화를 봤다. 시골의 점심은 김장김치나 신건지(무우를 소금에 절였다 물에 씻어먹는 것)에 찐 고구마를 먹거나 시큼한 김치에 수제비를 끓인 것, 혹은 김치 볶음밥이 인기가 좋았다. 우리 집은 누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겨울철 음식이 많았다. 어머니는 안방의 벽장 속에 곶감, 엿, 뻥튀기에 조청을 발라 쌀 강냉이를 입힌 산자 등을 숨겨 놓고 조금씩 꺼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용케도 숨긴 곳을 알아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야금야금 꺼내먹었다.
점심을 때우고 나면 만화를 봤다. 긴 겨울방학은 만화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박부성의 <고향눈>, 김종래의 <엄마 찾아 3만 리>, 추동성(고우영)의 <짱구박사>, 김성환의 <삼국지>, 김경언의 <ㄱ검사와 읍칠성이>, 김산호의 <라이파이> 등등이 내가 초등학교 때 본 만화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박부성의 <고향눈>을 가장 좋아했다. 만화 속의 진식이는 발명왕이었다. 이 만화는 권선징악적인 내용이었는데, 진식이의 상대편인 심통이는 나쁜 짓만 골라서 했다. 몇 해 전, 어떤 이야기 끝에 이 <고향눈>이야기가 나오자 동양화가 박 아무개 교수가 말하길, 동양화의 원로화가인 J씨가 바로 박부성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 바로 전화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의외로 강하게 부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념 문제와 관련된 어떤 사연이 숨겨 있지 않나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어린 나의 상상력을 북돋아주고 꿈을 심어준 이 만화를 언젠가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만화 100년전]에도 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삼학년 무렵, 나는 <고향눈>의 진식이가 한 대로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면 벽돌 찍는 틀로 눈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몰두했다. 동네 아이들과 편을 짜서 전쟁놀이를 하는데 벽돌은 생각보다 작았고 잘 찍히지도 않았다. 이때 우리들이 성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형이 "사과 궤짝으로 만들어야지."라고 말했으나, 시골에서 사과궤짝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 쌓기는 포기해야만 했다.

Wednesday, December 19,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 웅섭이 형과 나

▲필자가 유년시절에 흑백 사진 뒷면에 그린 사촌형의 모습

▲대학 시절에 승마를 하는 사촌형 윤웅섭의 모습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웅섭이 형과 나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골 큰 집의 부엌방은 사색과 독서를 하는 공간이었다. 동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사촌 형의 서재인 그 방에는 책이 가득했다. 사촌 형은 사방을 온통 선반으로 두르고 법학, 철학, 문학, 사회학, 경제학, 예술 등 다방면의 책들을 꽂아놓았다. 나는 어떤 책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읽었다. 그러나 훗날 내가 깨달은 사실은 그것들이 나의 사유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만일 나의 삶에서 이 시기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사촌형인 윤웅섭과 나의 나이 차이는 열 세 살이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형은 대학에 다녔다. 그런 나이 차 때문에 내가 중학생일 때 형이 보던 책을 큰댁의 부엌방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렵엔 형은 이미 대학을 오래 전에 졸업하고 취직을 위해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형의 서재는 나의 좋은 공부방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그래서 6학년 때는 밤늦도록 학교에서 입시공부를 했다. 담임선생님은 하루에 두 번씩 천안에서 배달된 문제지로 시험을 치며 가혹하리만치 공부를 시켰다. 그 덕택에 평택중학교에 전체 차석으로 합격을 했다. 입학을 하고 보니 나는 성적순으로 58명을 끊어 배정한 특별반에 편성되었다. 전체 반은 6반까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내 키는 큰 편이어서 맨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평택중학교는 고등학교와 같이 있었다. 인문과를 비롯해서 상과, 기계과, 화공과, 건축과, 전기과, 농과, 가정과가 있는 종합고등학교였다. 이 학교에는 중학교 삼학년인 내 바로 위의 형과 고등학교 이학년인 사촌형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어머니를 따라 예술제와 운동회를 겸한 축제에 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학교가 전혀 생소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때 예술제에서 본 미술 전시회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평택중학교를 지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입학을 하자마자 곧 바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쓰다 버린 목탄으로 석고상을 그렸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했다. 당시 미술반 선배들은 짙은 감청색 종이를 바른 화판에 나무로 만든 박스, 야외용 이젤 등을 들고 다녔는데 내 눈에는 그게 몹시 부러웠다. 그래서 이학년 때 아버지를 졸라 천안으로 가서 화구를 구입했다. 이젤과 화판, 박스를 한 아름 안고 걸어가는데, 동네 청년들이 일을 하다 말고 쳐다보며 “그게 측량기냐?”고 물었다. 그 무렵 사춘기를 맞은 나는 마음이 들떠 공부보다는 박스를 들고 야외로 다니며 사생을 하거나 멋을 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중학시절의 일탈에 대해서는 <창의력이란 무엇인가-윤진섭과의 대화>(전경원 교수 저, 신원, 2008) 에서 소상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 단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래도 독서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독서는 입학 후 두 해를 신나게 놀고 나서인 삼학년 신학기에 들어서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성적이 완전히 바닥을 쳐서 전체에서 삼분의 일 이하로 밀려있었다. 책만 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도서실에서 <소공녀>부터 읽기 시작했다. 진도는 매우 빨리 나갔다. 한 달 후 박종화의 대하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잡았을 때는 어느 정도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이미 물 건너 간 듯 보였다. 담임선생은 인문계는 어림없으니 농과나 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느니 차라리 서울 가서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다. 마침 반 친구 중에 삼촌이 만화가인 친구가 있어서 서울로 달아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사촌형이 이천의 시골 작은 학교에 영어교사로 있었다. 형은 아버지의 승락을 얻어 나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천의 경남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 학교는 농과와 상과를 합쳐 모두 50명인 남녀공학의 작은 학교였다. 이천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와 유지광의 고향이다. 실제로 그곳에 가서 보니 학교가 있는 금당리에는 자유당 때 이정재가 지어준 공회당이 있었다. 또한 남노당원이던 이주하의 고향인 장천리가 학교와 지척에 있었다. 김삼룡과 함께 유명한 남노당원인 이주하는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틈바구니에서 활약한 김일성 수하의 공산당 수괴였다. 이천은 도자기와 쌀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그런 역사도 지니고 있다. 80년에 초반, 자유당 시절 날리던 주먹계의 거두 유지광이 이천에서 죽었는데 전국의 건달 수백 명이 모여든 곳이다. 그런 곳이 내가 일년 뒤 수원의 수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머물 곳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사촌 형을 따라 처음 이천에 가던 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다음 날이었다. 죽산 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리니 눈이 하얗게 덮인 천지에 키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가득했는데, 그 주변을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떠돌며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순간, 나는 박종화의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읽은 강계를 떠올렸다. 송강 정철이 ‘위리안치(집의 주변을 가시나무로 둘러쳐 바깥출입을 못 하도록 하는 것)’라는 참혹한 형벌을 당하고 추운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장면이었다.
죽산 삼거리에서 길의 한 복판에 서니 한 쪽은 장호원, 한 쪽은 이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몸을 놀일 겸 쉬려고 들어간 이발소 벽에 웬 뚱뚱한 사람이 박사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알고 보니 당시 권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당시 그는 그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이천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련선생은 사람 좋기로 유명한 예비역 대위였다. 나중에 사촌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차지철과 군대 동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대위 계급을 끝으로 굴곡 없이 평탄한 군대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했다. 반면, 차지철은 승승장구의 출세가도를 달려 10여 년 뒤에는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죽는 비운의 인물이 된다. 그 둘이 한 공간에서 있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국회위원 선거 유세가 우리 학교 교정에서 열렸는데, 차지철이 재선을 위해 선거 유세차 들린 것이다. 그러나 마침 비가 왔기 때문에 교련 수업을 교실에서 해야 했고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 10. 26사태 때 나는 군대생활을 했는데, 그 때 이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긴 적이 있다.

사촌형은 방학 때면 시골에 내려왔다. 유난히 흰 피부에 미남인 형은 구렛나루를 멋지게 길렀다. 그런 형을 볼 때 마다 나는 구렛나루 수염이 시커면 인기 레슬러 장영철을 생각했다. 장영철은 나중에 "레슬링은 쑈다"라고 커밍아웃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장영철 다음에 부상한 사람이 박치기 왕 김일이다. 이들은 당시 코흘리개 꼬마들의 우상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대홍리에 사는 같은 반 친구 이홍수와 함께 레슬링을 보러 성환에 간 적이 있다. 텔레비전이 귀했던 당시 레슬링 중계는 만화가게에서 돈을 주고 봤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느 겨울 날, 우리는 십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성환 읍내 초입에 있는 만화가계에 갔다. 그런데 간 날이 장날이라고 레슬링 중계가 없었다. 이홍수가 잘 못 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만화만 보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이때 텔레비전 수상기를 처음 봤다. 그때가 아마 63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 동네에 도수 높은 검정 테 안경에 머리를 길게 기른 중년의 아저씨가 이웃집에 세를 살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시골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이0옥 선생의 부군이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어보였다. 가끔씩 정장을 하고 출타를 할 뿐이었다. 이 선생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딸이 나의 초등학교 일년 선배고 아들이 한 학년 아래였다. 그 집에는 열대여섯 살 된 집안일을 거드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는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에 다니는 사촌형과 무슨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기도 했다. 사촌형에게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일정 때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수재인데 사상문제로 붉은 줄이 가 취직을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마을의 앞동산 자락 밑에 있는 외딴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나와 친구들이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올라와서 직접 크레용을 쥐고 그려 주기도 했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름만 대만 알 만한 한 원로 소설가의 전 애인이었고, 그 소설가의 부친이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서 부수상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였다. 그런 인재가 어떻게 하여 외진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 오게 되었는가?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참 희한하게도 여러 면에서 희귀한 근대를 체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아, 역사의 아이러니여!

Tuesday, November 20,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중학교 시절, 나의 독서기(讀書記)
중학 이학년 시절에 내가 구입한 책들 중 하나다. 나는 어쩌다 돈이 생기면 평택역 앞에 있는 을지서점에 들려 책을 샀다. 을지서점의 주인은 전직 교사 출신의 대머리가 벗겨진 분이었다. 처음에는 문학책을 주로 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스탕달의 <적과 흑> 등등. 이 책은 순전히 현학 취미로 산 것이다. 제목 중 마지막 '편(片)' 자를 몰라 서점에 있는 옥편을 찾아본 기억이 난다. 저자 이름 안병욱의 '욱(煜)'자도 역시 옥편을 보고 알았다. 독서에의 몰입은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교과서 외의 독서는 이 무렵에도 꽤 이루어졌었나 보다. 이 책을 다시 살펴보니 "1969. 12. 20 Yun Jin Sup"이라고 사인이 돼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집의 책꽂이에는 큰 형이 보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 때는 중학교 입시에 매진하던 때였지만, 호기심에 형의 책을 떠들쳐 보곤 했다. 나의 현학 취미는 이런 환경에서 발동된 것 같다. 형의 책 중에 <일반사회 쇼트 코스>란 책이 있어서 보니 '게마인 샤프트'니 '게젤 샤프트'니 하는 단어들이 나왔다. 나는 뜻도 제대로 모르고 그 단어들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부흥회가 열린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갔는데, 서울에서 온 부흥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게젤 샤프트', '게마인 샤프트'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아는 단어가 나오니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졸고 있는 시골 할머니들한테 외국어라니 하고 웃음이 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이학년 무렵, 집에는 누나들이 보는 여성지들이 굴러다녔다. 아마도 '주부생활'이 아니었나 기억되는데, 돌아가신 이일 선생이 쓴 글이 거기에 실려 있었다. 이일(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라고 직함이 씌여 있었다. 파리 시절의 유학기를 쓴 것 같은데, 마지막 부분에 '그녀와 함께 나는 침대로 갔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일 선생이 돌아가신 해, 새해 인사 자리(선생은 정초면 평론가협회 회원들을 댁으로 초대했다)에서 내가 "선생님은 마지막 남은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십니다"하니까 파안대소하며 좋아했다. 그처럼 멋진 분이니까 여성잡지에 그런 연애담을 썼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지면에서 그렇게 만난 분과 훗날 사제지간의 연을 맺고 평론계의 어른으로 모시게 됐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중학교 삼학년 가을 무렵,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위한 경비를 거두었다. 그 때 돈으로 3천 4백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수학여행을 안 가고 그 돈으로 책을 샀다. 처음에는 책을 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을지서점에서 막 출간된 동화출판공사의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욕심이 났다. 붉은색 바탕에 금박의 글씨가 찍힌 호화양장본이었다. 전직교사 출신의 책방 주인도 이런 책은 꼭 읽어봐야 한다며 나의 호기심을 부추긴 것도 책을 사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카프카의 '城',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세익스피어의 희곡집,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 아쿠다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의 '하동(河童),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 등이 실린 일본소설집 등이었다. 이 책들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단,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 합본된 책만 없는데, 그것은 내가 군에 있을 때 작은 형의 여자 친구가 빌려갔다가 사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도 책은 절대 빌려줄 일이 아니다.
이 무렵, 나는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하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삼학년 가을, '장마'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써서 응모했다. 흰색 편지봉투에 2백자 원고지 60매를 접어 구겨 넣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 누런 큰 봉투는 생각도 못 했다. 편지를 부치고 나서 새해 1월 1일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결과를 보니 '신경득'이라는 분이 가작으로 당선을 했다. 5. 25를 배경으로 쓴 글인데, 국민학교 여선생의 사랑 이야기와 인공 치하 산간 마을 아이들의 일상이 버무려진 소재로 재치는 있었지만 산만한 글이었다. 훗날 보니 이 분은 어느 대학의 교수가 돼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반은 한자고 반은 한글이었다. 나는 옥편을 뒤져가며 신문을 읽었다. 안병욱 교수가 번역한 이 책 역시 그랬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는 어느 때는 한글 전용이었다가 어느 때는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梨花女子大學校'를 '배꽃계집들의 배움터'라고 쓰자고 외친 골수 한글 전용주의자였다. 반면에 인상파 풍의 화가로 유명한 오지호 선생은 국한문혼용주의자였다. 나는 몇 해 전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그런 주장을 담은 오지호 선생의 저서를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을 그 때 사지 못 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 값도 비싸지 않았는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애서가로 유명한 고(故) 민병산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책은 발견하는 즉시 사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과연 맞는 말이다.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오른쪽이필자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나의 어머니는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말년의 10년간은 치매를 앓았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한 번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댁은 뉘시유?" 하고 물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의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 이 사진은 그 무렵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가 속바지 주머니에 휴지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것을 발견해 보관해 온 것이다.

?1969년, 중학교 2학년 때 평택의 한광중학교 뒷산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처녀의 젖가슴처럼 알맞게 부풀어 오른 그 산의 정상에는 흰색의 충혼탑이 있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평택중학교 미술반 학생들은 방과 후에 그림을 그리러 자주 그곳엘 갔다. 우산을 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 충혼탑은 평택에서 2십리 떨어진 나의 생가에서 바라보면 학이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년시절, 나는 아스라이 펼쳐진 녹색의 평야 저편에 작게 보이는 그것이 학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우산모양의 충혼탑과 학의 사이에는 10년이란 세월이 개재돼 있었다. 그것은 내게 꿈과 현실에 대한 구분을 환기시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미술반 활동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것은 각종 실기대회이다. 한번은 홍익대 주최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 전날 밤에 평택으로 나와 초등학교 2년 선배인 홍록이네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평택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집합시간이 너무 일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는 버스가 없어 낸 아이디어였다. 흥건이네는 고향 마을에 살다가 그 무렵 마침 평택으로 이사를 한 차였다. 흥건이 어머니는 신 새벽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주며 "꼭 성공을 혀." 하고 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이른 새벽, 평택 역에는 열차를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 서너 명이 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할 때 마다 승객들이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하얀 색 가로등이 졸고 있는 역사 밖에는 펨푸로 보이는 여자들이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들고 호객행위를 했다. "놀다가세요. 이쁜 아가씨 있어요." 말을 할 때마다 그녀들의 입에서는 하얀 김이 뿜어 나왔다. 남자들은 팔을 잡은 여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몸이 오싹 할 정도로 추운 늦가을 새벽은 그렇게 겨울의 문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 무렵은 하얀 증기를 내뿜는 기차에서 디젤열차로 바뀌어 가던 시점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1968년의 일이다. 지리교사인 이석구 선생(작고)은 수업시간이면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게 했다. 이 해에는 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넘어와 나라 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곧 이어 향토예비군이 결성되고 고등학교에 교련이 실시되었다(1969).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을 때, 첫 미술시간의 일을 잊지 못한다. 미술수업을 미술반에서 했는데, 선배들이 남긴 목탄으로 아그리퍼를 그렸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장발을 멋지게 기른 오수웅 선생이 그림을 들여다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 뭐가 되겠는데....."하고 지나갔다. 당시 일학년 미술담당은 최영균 선생이었다. 환갑을 넘긴, 뚱뚱한 체구의 선생님은 마음이 좋고 너그러워 우리들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동양화와 서예를 하셨는데, 묵향이 좋아 나는 선생님의 곁에서 한참동안이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선생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몇 년 뒤였다.
그 날,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린 우리 미술반 일행은 버스로 갈아타고 홍대 앞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본 홍대 캠퍼스는 좁았다. 운동장 위에 철판으로 만든 둥근 콘센트 건물이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그렸는지는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나중에 상장이 도착하여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조회시간에 이 상장을 받았다. 한국근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이마동 학장의 명의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나의 중학교 시절, 미술반은 실습 동(棟)에 있었다. 당시 평택중학교는 평택종합고등학교와 같은 캠퍼스 안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듯한 본관은 고풍스런 목조건물이었다. 그 뒤에 콘크리트로 지은 실습동이 있었다. 그 사이를 구름다리가 연결했다. 교사(校舍) 여기저기에는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 중에는 풍경을 그린 임송희 선생의 동양화도 있었다.
당시 평택종합고등학교에는 대학진학을 위한 보통과를 비롯하여 상과, 전기과, 기계과, 건축과, 농과, 가정과가 있었다. 미술실로 가기 위해 실습실 복도를 지나갈 때면 가정과 여학생들이 만든 자장면 냄새가 나곤 했다. 미술실 옆으로 도서관으로 통하는 뒷문이 있었는데 그 문으로 흰 블라우스에 검정스커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처녀 사서가 드나들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하루는 형사가 나를 찾아왔다. 미술반 지도교사인 여선생이 옆에서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 했다. 형사는 내가 공모전에 낸 포스터를 문제 삼았다.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과 그 위에 그린 낫과 망치(공산당 마크)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본 딴 것이라고 했다. 이 일은 내가 문제의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증거로 제시했기 때문에 무사히 풀렸지만, 당시의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를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나는 지금도 무엇에 한번 빠지면 다른 건 다 잊는 버릇이 있는데, 원 없이 공부를 안 한 때가 중학교 1-2학년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아예 가방을 안 가져가고 화구 박스만 들고 등교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공부의 바닥을 보았다. 자생적인 깨우침이 온 것은 중삼 1학기였다. 너무 노니까 지식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때부터 방과 후에 도서관에 박혀 밤늦게까지 살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상(李箱)을 만났다. 그것은 거의 운명적이었다. 전위(avant-garde)에 대한 나의 열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큰 형수가 시집을 오면서 지참한 물건 속에 <한국단편문학전집 2, 白水社 刊, 1968>이 있었다. 거기에 김유정과 함께 이상의 소설, 시 등이 실려 있었다. 고향집의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나는 이상을 탐독했다.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어렴풋이 집히는 게 있었다. 나는 점차 그 세계에 빠져 들었다. 이상의 세계는 훗날 내 감수성의 젖줄이 되었다. 이상이 두 번째로 내게 다가온 것은 대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1974년 2월이었다. 당시 <문학사상>이 많은 자료를 발굴하여 이상의 사진 화보와 함께 '이상특집'을 발간했다.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문종혁 씨는 이상의 화우였는데, 그의 증언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얼마 전에 아르코미술관에서 '이상 1백주기 특별 전람회 <李氏의 출발>을 기획했는데, <문학사상>의 이 특집호가 참고문헌에서 누락된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중 학시절, 나는 극심한 방황기를 겪었다. 누군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이렇다할 사건 없이 보냈을까만 내 경우엔 유독 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댄디즘(dandyism) 비슷한 것이었으며, 치열한 열병이고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어렵게 입시공부를 해서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미술반에 등록을 한 뒤로는 멋을 부리며 건달 생활을 했다. 당시 학생 사회에는 쏘울 춤이 유행을 했다. 이 무렵 춤에 빠져 본 사람은 "울리 불리", "기타맨", "샹하이 트위스트"가 얼마나 어린 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지 알 것이다. '고고(GO GO)"는 좀 지나서 유행을 했지만, 당시 쏘울 춤은 내게 종교요 신앙이었다. 이 사진의 맨 오른쪽이 나인데, 신문을 5센티 넓이로 접어 넣은 러시아 병정 모자 같은 교모에 흰색 폴라 티, 나팔바지, 검정색 단화 일습을 갖추고 있다.
그 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 중에 김0규가 있었는데, 그 애의 집이 학교 앞 비전리 삼거리 부근에 있었다. 당시 그의 홀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훗날 내가 대학에 진학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게 뒤편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본 그의 얼굴은 이미 도인의 그것에 가까웠다. "어떻게 지내냐? " 내가 묻자 그는 빙긋 웃더니 눈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기,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봉창 문에는 딱 책받침 반 크기 정도의 찢어진 구멍이 있었다. "저거 보는 재미로 산다." 구멍 너머로 앞집의 수도가 보였다. 마침 그 집의 주부가 정면을 향해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치마 사이로 붉은 색 팬티가 선명했다. "재수가 좋으면 하루에 두 번도 봐." 녀석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는 왜 내 사진을 수십 년이나 간직했을까? 기독교에 심취했던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기도하며 팔남매나 되는 형제들을 모두 인가 가정으로 만들었다. 단, 우리 가족만 빼고. 초등학교 사학년 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천안의 성거산 집회에 간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운집한 대규모 집회였다. 나는 기도에 몰입을 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 보다는 철야를 할 때 산 너머로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더 좋았다. 나는 숲을 뒤져 산 도라지나 캐면서 일주일간의 기나 긴 집회 기간을 보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머니는 내게 무엇을 하지 말라 이른 적이 없었다. 그냥 빙긋이 웃으실 뿐이었다. 이 무렵 내가 어머니의 속을 몰랐던 것은 어머니가 그 속내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언젠가 들여다 본 수 십 길의 컴컴한 우물 속처럼 깊고도 단단한 속마음. 세월은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그 속을 조금 보여주는 수도 있지만, 모르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말로 어떻게 마음을 설명할 것인가. 그나저나 김0규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과연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Friday, September 14, 2012

어느 미술인의 죽음 고(故) 문희돈 사장의 영전에


▲쿤스트독갤러리에서- 왼쪽부터 홍순환, 윤진섭, 고 문희돈

윤진섭(미술평론가)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해 황망해 하는 수가 있다. 근자에 내가 겪은 일을 꼽자면 고(故) 문희돈 사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불과 1주일 전에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어느 날 뜻밖에도 급성 뇌졸중으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문자가 휴대폰에 뜬 것이다. 그게 한 5월 중순께의 일이다. 병원에 찾아가 보니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 침상에 누운 그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편안해 보였다. 몸에는 여러 개의 호스가 코와 입에 삽입돼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완전한 사망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는 노(老) 부모님의 가녀린 희망이 기계적인 호흡을 유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6월 18일에 만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문희돈 사장은 미술 포털 사이트인 ‘아트다(artda.co.kr)'의 경영자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한국화가로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80년대 후반이니 그와의 교유도 어언 20여 년을 훌쩍 넘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툼한 검정 테 안경에 기골이 장대하여 얼굴이 언뜻 보면 백범 김구 선생을 연상시켰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나를 따랐다.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늘 깍듯하게 대했다. 나 역시 평소건 술자리에서건 때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쓰는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후배처럼 곡진하게 대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돌면 늘 자신은 ‘꼴통’이라고 했다. 꼴통이 뭔데? 하고 내가 물으면 “한번 ‘고(go)’면 영원한 고”라고 설명을 했다. 그 말의 뉘앙스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이어서, 자신이 의리의 사나이임을 은근히 내비치는 특유의 제스처였다.
 문희돈 사장과 나와의 각별한 인연은 2천년, 내가 인사동에서 <서울국제행위예술제>를 기획할 때 비롯되었다. 그 무렵, 마침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 최종후보에 오른 나는 그 일 보다도 행위예술제에 온 정열을 쏟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는 홍순환 선생(현 쿤스트독 갤러리 관장)이 마침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행위예술제는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지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바로 문희돈 사장이었다. 그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행사가 크게 성공을 하여 KBS, MBC, SBS 등 3대 TV 방송의 저녁 9시 메인 뉴스에 경쟁적으로 보도되자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말했다. “내 언제 너를 크게 도와줄 날이 있을 게야.” 그러나 나는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마음속에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화가로서의 입신을 포기한 그는 화단의 마당발을 자처하며 전시회 소식을 발로 뛰며 알리는 일에 주력을 했다. ‘아트다’는 그렇게 해서 컨텐츠를 늘려나갔다. 특히 ‘전시 후기’라고 이름을 붙인 코너는 뒤풀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으로 인기가 높았다. 유난히 술을 즐겼던 그는 그 외에도 술집 풍경을 자주 올렸는데 그런 장면은 다른 미술 포털 사이트에는 없는 그 특유의 것이었다.
 말년의 몇 해 동안 그는 딜러협회의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미술시장이 탄탄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딜러들이 소임과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딜러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협회의 창립이 불가피하다며 이의 출범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그는 협회의 창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사업의 부진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의 사인이 된 급성 뇌졸중은 모르는 사이에 그의 건강을 갉아먹은 복병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나의 졸시(拙詩)가 있으니 여기에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사랑하는 아우 희돈에게

 문희돈, 너는 평소 입이 걸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따뜻했다.
 가끔씩 쏟아내는 육두문자는 맛 있는 술 안주였고
 네 무식은 곧 유식이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한 너였기에
 너는 내게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때로는 네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너에게서 배운 게 많았기에
우리 모두는 누구의 선생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일 뿐,
눈물의 강을 건너 환희의 기슭에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리.
세상이 동등의 피륙으로 짜여져 있음을
그 화안한 세상에 그 누가 그 누구보다 잘 났으리.
너는 늘 가난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도와주었다. 한 잔의 막걸리로도
그런데 김구 선생을 닮은 너의 기골도
과도한 스트레스는 이기지 못하였구나.
문희돈, 네가 없이 내 무슨 재미로 통의동 골목을 쏘다니리.
너 없이 마시는 술은 더 이상 재미가 없어. 일어나거라, 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병상을 툭 털고 일어나
통의동 그 허름한 선술집 모퉁이에 앉아
뽀얗게 익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나를 기다리거라.
그리하여 세상에 기적도 존재함을
몸으로 증거하거라.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어렸을 적,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순희 누나가 드디어 시집을 갔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나는 순희 누나가 평택 동삭리라는 곳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벽장 돗자리 밑에 넣어둔 아버지의 돈을 꺼내서 무작정 누나네 집을 찾아 나섰다. 황사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그 때는 누나가 시집을 간지 다섯 달 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진설명: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형의 소풍을 따라간 순희 누나와 함께 성환목장에서. 누나가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다.)
평택은 나의 고향인 천원군 성환읍 수향리 지족향(속칭 지질캥이)에서 이 십리 떨어진 곳이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궁리를 거듭한 끝에 집에 아무런 말도 안하고 누나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벽장 밑 돗자리 밑에 감춰둔 아버지의 돈 20원을 꺼내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발을 하러 동네 이발소로 가는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이발소 옆에 마침 공사 중이던 공민학교 건물의 나무 골조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동네이발소에서 일하는 형에게 말해 외상으로 머리를 깎고 1킬로미터나 되는 버스정류소를 향해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갔다. 바람의 힘은 나를 거의 날려버릴 지경이었다. 뿌연 황사바람에 몰려온 모래가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눈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 이었다. 평택은 혼자서는 초행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 무조건 큰 길로 걸었다. 평택은 전에 엄마나 누나하고 온 적이 있어서 물으면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를 내려보니 막막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삭리를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길을 가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길가에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묻기로 했다. 오징어를 하나 구워달라고 하고 동삭리라는 곳을 아느냐고 아줌마에게 물으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잘 모른다고 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바람은 여전히 드셌고 날은 몹시 추웠다.
 집에 들어가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는 혼이 날까봐 거짓말을 둘러댔다. 순희 누나가 보고 싶어 평택에 갔다는 것, 동삭리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경찰서로 갔다는 것, 경찰이 백차로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줘서 올수 있었다는 것 등등을 조리 있게 말했다. 막내 누나는 백차가 데려다 줬다니까 똑똑하다고 굉장히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보고 싶은 순희 누나를 찾아가려 한 나의 거사(?)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내가 첫 대학입시에 실패를 하고 재수를 할 때인 1974년에 순희 누나는 왕십리에 살았다. 처음으로 서울에 살게 된 나는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는 균명고등학교 앞에 있는 모범독서실(이 독서실이 지금도 있는 것을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보고 놀란 적이 있다)에 적을 두고 낮에는 광화문에 있는 대성학원과 서울미술학원에 다녔다. 일년 내내 다닌 것은 아니고 학비 절감을 위해 한두 달씩 건너 뛰어 등록을 했다. 당시 광화문 학원골목 부근에 코미디언 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뚱뚱이 최용순, 임희춘 씨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점심 때 중국집에 갔는데 서영춘 씨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내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근엄해 보였다. 예상외로 전혀 웃지를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숫기가 없던 나는 인사도 못하고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불렀다. "어이, 보이! 손님께 엽차를 갖다 드려야지." 하면서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당시 50원 인가 하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는 나갈 때 거스름돈을 세더니 반을 접어 남방 윗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서울미술학원과 건너편에 있는 대성학원에 간헐적으로 다니면서 지금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서용선(전 서울대 교수, 화가), 김승연(홍대교수), 김봉준(화가), 이인범(상명대 교수), 고(故) 강용대(화가) 등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미술학원으로는 서울미술학원과 모뉴망이 있었는데, 서울미술학원은 당시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 중이던 전영화 선생(한국화가)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내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송주영인데, 그녀는 경북 대구(?) 출신으로 경상도 말을 진하게 쓰고 전혜린과 고갱을 좋아했다. 광화문 근처의 개인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친구를 찾아 서울미술학원에 왔다가 어찌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개성이 강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여 남자 친구처럼 '이형'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이 송씨였다. 그녀는 그때 이미 삼수인가 사수를 해서 입시는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담배가 골초인데 술은 체질적으로 못 했다. 얼굴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에 집시풍의 옷을 좋아해 한눈에 봐도 예술가 같아 보였다. 그녀는 내가 이듬해 홍대에 입학을 해 한 두 해 정도는 가끔씩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 무엇을 하는지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황학동 성동여고 건너편에 나보다 나이가 한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청주 출신의 화가가 작은 화실을 경영하며 입시생들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는 왕십리 순희 누나네 집이 가까운 관계로 오다가다 들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때 고등학교 삼학년 입시생 중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목판화가 김준권이다. 나는 재수를 해서 머리를 기르고 또 나이보다 노숙해 보여서 김은 나를 깍듯이 형으로 불렀는데, 이듬해에 우리는 같이 홍대에 입학을 했다.
 이 화실에 윤 선생이라고 부르는 삼각지에서 미군을 상대로 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자주 놀러왔다. 그는 화실 원장(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다)과 친구였다. 또 서울미술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우는 홍대 지망의 삼수생 친구도 이 화실에 자주 놀러왔다. 지인들은 몇몇이 더 있었다. 이 화실은 신당동 근처에 한 세 번 정도 이사를 다녔는데, 황학동의 지하실에 세를 살 때는 추운 겨울날 난로도 없이 털옷 속에 발을 집어넣고 동동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홍대 입시를 치루고 나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발표 하루 전 날 송주영이가 화실로 나를 찾아왔다. 이 무렵에는 화실이 길 건너편 건물의 이층으로 이사를 가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혹시나 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보자마자 대뜸 축하한다는 말부터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알았냐니까, 학교의 고위층 부인을 자기가 잘 아는데 부탁을 해서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실제로 합격이 돼 있었다.
 이 소식을 알리러 저녁때 다시 화실에 갔다. 윤 선생, 화실 원장, 디자인 지망의 삼수생 친구 등이 난롯가에 빙 둘러 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가 합격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합격을 했으니 한 잔 사라는 것이었다. 마침 주머니에 오백 원이 있어서 선뜻 그러마고 했다. 당시 오백 원이면 지금 돈 만 원 정도 됐다. 그 정도면 소주 한 잔 못 사랴 했는데 이들이 정작 들어간 곳은 신당동 니나노 집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 진 물,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우선 놀고나 보자. 신나게 젓가락 장단 맞추고 놀다 보니 안주접시가 산더미 같고 소주병이 상 주변에 즐비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놀았을까. 취한 눈을 뜨고 보니 친구들은 간 데가 없고 주인이 돈을 내란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오백 원짜리 지폐 달랑 한 장뿐이었다. 이미 통금에 걸려 누나네 집에 가서 돈을 꾸어올 형편도 아니었다. 사정을 이야기 하니 주인 영감이 그러면 아가씨들하고 한 방에서 같이 자고 내일 날이 밝으면 해결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빨간 불이 켜진 방에서 아가씨 둘 하고 같이 자게 됐는데, 술이 좀 취했지만 잠도 안 오고해서 뒤척이는데 옆에 누운,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어이, 총각. 그림 그려?" "응,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 하는 이야기 들으면 척이지." "그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우리 작은 아버지도 화가야." 나는 그 순간 갑자기 귀가 솔깃해 졌다. "화가? 누구?"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K씨가 자기 작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 그 장미 잘 그리는 화가?" 내가 말했다. "응, 내가 그 집에 가면 장미그린 그림이 많았어." 이런 젠장 K 선생의 조카를 술집에서 만나다니. 나는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 주인 영감이 어서 돈을 가지러 가자고 문밖에서 벌써부터 성화였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신을 발에 꿰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나를 버려두고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을까? 괘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순간, 집히는 게 있었다. 그래 아마 지금쯤 화실에 몰려 있을지도 몰라. 나는 걸음이 굼뜬 주인 영감을 재촉하여 근처의 화실로 향했다. 화실 문을 여니 과연 그들이 있었다. 원장은 없고 윤선생과 삼수생 친구가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연탄난로 불을 손을 쬐고 앉아 있었다. “야,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런 순....”하고 버럭 화를 내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선생이 갑자기 난로에서 벌겋게 단 연탄집게를 집어 들더니 나를 겨누며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홍대에 갔어? 이 새끼, 너 나한테 오늘 죽어볼래?” 순간, 벌건 연탄집게가 나를 향해 날아올 것 같았지만, 짐짓 침착함을 가장하고 맞대응을 했다. 내가 누구냐, 일찍부터 그 세계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너 오늘 사람 잘못 봤다. “얼씨구, 이 친구 봐라.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한 나는 돈이 나올 싹수가 노랗다는 판단을 하고 왕십리 누나에 집으로 가서 돈을 얻어 계산을 치렀다. 몇 시간 뒤 다시 화실에 갔을 때 그 친구들은 이제 완전히 술이 깨서 자신들이 한 일을 사과했다. 취기가 부른 해프닝이었다. 나는 그 사과를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대학에 입학하면서 화실의 존재는 점차 잊혀졌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가슴에  황사바람이 불던 황량한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다.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33("Into the Memory" Series 33)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33("Into the Memory" Series 33)
수학여행의 추억과 팝아트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렸던 1967년 당시 나는 시골의 국민학교 6학년생이었다. 훗날 미술대학에 진학을 해 ‘한국현대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이 해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알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사건과는 무관하게 중학교 입시를 코앞에 두고 책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비록 나중에 일제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 명칭을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꾸긴 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용어에 대해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지금도 눈에 삼삼한 것은 충청도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던 때의 추억이다.
 그 무렵 내 또래의 시골 아이들이 대개 그랬듯이, 나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하얗게 밝혔다. 그리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코끝에 닿는 새벽 공기의 싸늘함을 느끼며 역에 이르는 10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갔다. 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늦가을의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떨며 어둠 속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기차는 ‘칙칙폭폭’ 하며 코에서 하얀 증기를 내뿜는 시커먼 증기기관차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차가 멀리서 기적 소리를 내며 플랫폼에 들어서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 “이제 드디어 고대하던 서울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 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해서 둘러본 서울은 한 시골 초등학교 아이의 눈에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충청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팝’과 관련된 각별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내가 자란 마을은 면사무소가 있는 성환과 경기도 평택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미군기지촌이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 약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는 혼혈아들이 간혹 눈에 띄었고, 수업이 끝나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그 애들을 따라다니며 “미국놈, 미국놈” 하고 놀려대곤 했다. 그런 아이들의 놀림에 키가 크고 힘이 센 혼혈아들은 대항을 했지만, 저학년 여자 아이들이나 몸이 작은 남자 아이들은 훌쩍거리며 울 뿐이었다. 일부 눈치가 빠른 혼혈아들은 학교에서 힘깨나 쓰는 고학년 아이들에게 미제 물건을 주며 호감을 사려고 했다. 그 물건이란 게 고작 쓰고 버린 플라스틱 샴푸 통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물을 담아 사용하면 훌륭히 물총을 대신했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그것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마을 앞동산 굵은 참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동네 종으로 쓰던 포탄의 탄피다. “댕,댕,댕,댕......” 일년에 한 두 번 쯤 동네 누구네 집에 불이라도 나면 그 종은 차가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빠른 템포로 울곤 했다. 그것은 또 동네 청년이 징집을 당해 군대에 가면 “댕...댕...댕...댕”하고 느리게 울었다. 그러면 종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아침 식전에 동구 밖 언덕에 하얗게 모여 만세삼창을 불렀다.
 동네 종은 6.25전쟁이 남기고 간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6. 25전쟁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미군주둔이라는 선물을 한국사회에 남겼다. 나이가 어린 내 또래의 아이들은 처음에는 혼혈아의 존재에 대해 영문을 잘 몰랐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회 교과서에 나온 역사를 통해 점차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네댓 살 때 처음 본 방물장수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 들어있던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생긴 미제 물건들을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솔이 있는 부분을 투명 셀로판지로 덮은 곽 속에 담긴 칫솔이며, 코를 대고 맡으면 상큼한 냄새가 나는 세수 비누와 샴푸 등등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미제 상품들의 이미지는 주로 디자인과 관계된 것이다. 당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미제 물건을 팔던 그 아주머니는 타동네의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기도 했고, 혼기가 찬 젊은 남녀들의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기도 했다.
 팝과 관련된 나의 또 하나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송병수의 소설 <쑈리킴>과 관련된 것이다. 미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할로 쪼꼬렛!’을 외치곤 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을 오십대 후반의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의 의미를 잘 알리라. 국도 변에 어쩌다 미군 병사들이 탄 트럭이라도 서 있으면 아이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들곤 하던 그 쓰라린 추억을.
 어쩌다 미군들이 탄 트럭이 마을 앞 국도를 지나가면 아이들은 트럭을 향해 ‘할로 쪼코렛!’을 외치곤 했다. 그러면 미군들은 먹을 것을 그냥 곱게 주는 법이 없었다. 꼭 도로변의 수풀이나 도랑 같은 후미진 곳에 던져 줍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곤 했다. 하루는 미군 트럭이 국도에 놓여 있는 다리 근처에 서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여 들자 미군병사 하나가 냅킨에 싼 샌드위치를 다리 밑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옷을 입은 채로 그걸 건지러 가슴팍까지 차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장맛비에 냇물이 불어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비록 사람들의 무리 속에는 어른들도 몇 명 섞여 있어 안심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무사히 샌드위치를 건져가지고 나왔고, 그 순간 트럭에서는 미군병사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휘파람 소리에 섞여 터져 나왔다. 
 1957년 작인 송병수의 <쑈리킴>은 전후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기지촌의 삶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기지촌에 사는 전쟁고아들의 신산한 삶을 다룬 이 소설은 주인공인 쑈리킴의 눈을 통해 본 기지촌 사람들의 처절한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초컬릿’과 ‘씨레이션’은 당시 미국의 군대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한국의 팝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양공주 따링의 발에 신겨진 구멍 난 양말처럼 남루하고 누추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팝 뮤직이 용산의 미팔군 클럽 무대에서 태동하고 성장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에는 서양 냄새가 난다고 내치기에는 너무나 끈끈하고 신산했던 우리네 삶의 숨결이 녹아 있어 차라리 보듬고 아끼는 편이 더욱 맘이 편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한국 팝의 지난한 역사는 서양인의 삶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란 점에서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비판보다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망가진 삶이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라고, 이젠 너무 늙어서 힘이 없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철없는 양공주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란 다시 살거나 고쳐 쓸 수 없는 매 순간의 실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