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어느 미술인의 죽음 고(故) 문희돈 사장의 영전에


▲쿤스트독갤러리에서- 왼쪽부터 홍순환, 윤진섭, 고 문희돈

윤진섭(미술평론가)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해 황망해 하는 수가 있다. 근자에 내가 겪은 일을 꼽자면 고(故) 문희돈 사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불과 1주일 전에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어느 날 뜻밖에도 급성 뇌졸중으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문자가 휴대폰에 뜬 것이다. 그게 한 5월 중순께의 일이다. 병원에 찾아가 보니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 침상에 누운 그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편안해 보였다. 몸에는 여러 개의 호스가 코와 입에 삽입돼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완전한 사망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는 노(老) 부모님의 가녀린 희망이 기계적인 호흡을 유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6월 18일에 만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문희돈 사장은 미술 포털 사이트인 ‘아트다(artda.co.kr)'의 경영자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한국화가로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80년대 후반이니 그와의 교유도 어언 20여 년을 훌쩍 넘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툼한 검정 테 안경에 기골이 장대하여 얼굴이 언뜻 보면 백범 김구 선생을 연상시켰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나를 따랐다.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늘 깍듯하게 대했다. 나 역시 평소건 술자리에서건 때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쓰는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후배처럼 곡진하게 대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돌면 늘 자신은 ‘꼴통’이라고 했다. 꼴통이 뭔데? 하고 내가 물으면 “한번 ‘고(go)’면 영원한 고”라고 설명을 했다. 그 말의 뉘앙스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이어서, 자신이 의리의 사나이임을 은근히 내비치는 특유의 제스처였다.
 문희돈 사장과 나와의 각별한 인연은 2천년, 내가 인사동에서 <서울국제행위예술제>를 기획할 때 비롯되었다. 그 무렵, 마침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 최종후보에 오른 나는 그 일 보다도 행위예술제에 온 정열을 쏟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는 홍순환 선생(현 쿤스트독 갤러리 관장)이 마침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행위예술제는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지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바로 문희돈 사장이었다. 그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행사가 크게 성공을 하여 KBS, MBC, SBS 등 3대 TV 방송의 저녁 9시 메인 뉴스에 경쟁적으로 보도되자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말했다. “내 언제 너를 크게 도와줄 날이 있을 게야.” 그러나 나는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마음속에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화가로서의 입신을 포기한 그는 화단의 마당발을 자처하며 전시회 소식을 발로 뛰며 알리는 일에 주력을 했다. ‘아트다’는 그렇게 해서 컨텐츠를 늘려나갔다. 특히 ‘전시 후기’라고 이름을 붙인 코너는 뒤풀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으로 인기가 높았다. 유난히 술을 즐겼던 그는 그 외에도 술집 풍경을 자주 올렸는데 그런 장면은 다른 미술 포털 사이트에는 없는 그 특유의 것이었다.
 말년의 몇 해 동안 그는 딜러협회의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미술시장이 탄탄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딜러들이 소임과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딜러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협회의 창립이 불가피하다며 이의 출범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그는 협회의 창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사업의 부진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의 사인이 된 급성 뇌졸중은 모르는 사이에 그의 건강을 갉아먹은 복병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나의 졸시(拙詩)가 있으니 여기에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사랑하는 아우 희돈에게

 문희돈, 너는 평소 입이 걸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따뜻했다.
 가끔씩 쏟아내는 육두문자는 맛 있는 술 안주였고
 네 무식은 곧 유식이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한 너였기에
 너는 내게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때로는 네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너에게서 배운 게 많았기에
우리 모두는 누구의 선생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일 뿐,
눈물의 강을 건너 환희의 기슭에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리.
세상이 동등의 피륙으로 짜여져 있음을
그 화안한 세상에 그 누가 그 누구보다 잘 났으리.
너는 늘 가난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도와주었다. 한 잔의 막걸리로도
그런데 김구 선생을 닮은 너의 기골도
과도한 스트레스는 이기지 못하였구나.
문희돈, 네가 없이 내 무슨 재미로 통의동 골목을 쏘다니리.
너 없이 마시는 술은 더 이상 재미가 없어. 일어나거라, 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병상을 툭 털고 일어나
통의동 그 허름한 선술집 모퉁이에 앉아
뽀얗게 익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나를 기다리거라.
그리하여 세상에 기적도 존재함을
몸으로 증거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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