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말년의 10년간은 치매를 앓았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한 번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댁은 뉘시유?" 하고 물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의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 이 사진은 그 무렵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가 속바지 주머니에 휴지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것을 발견해 보관해 온 것이다.
?1969년, 중학교 2학년 때 평택의 한광중학교 뒷산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처녀의 젖가슴처럼 알맞게 부풀어 오른 그 산의 정상에는 흰색의 충혼탑이 있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평택중학교 미술반 학생들은 방과 후에 그림을 그리러 자주 그곳엘 갔다. 우산을 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 충혼탑은 평택에서 2십리 떨어진 나의 생가에서 바라보면 학이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년시절, 나는 아스라이 펼쳐진 녹색의 평야 저편에 작게 보이는 그것이 학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우산모양의 충혼탑과 학의 사이에는 10년이란 세월이 개재돼 있었다. 그것은 내게 꿈과 현실에 대한 구분을 환기시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미술반 활동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것은 각종 실기대회이다. 한번은 홍익대 주최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 전날 밤에 평택으로 나와 초등학교 2년 선배인 홍록이네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평택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집합시간이 너무 일렀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는 버스가 없어 낸 아이디어였다. 흥건이네는 고향 마을에 살다가 그 무렵 마침 평택으로 이사를 한 차였다. 흥건이 어머니는 신 새벽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주며 "꼭 성공을 혀." 하고 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이른 새벽, 평택 역에는 열차를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 서너 명이 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할 때 마다 승객들이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하얀 색 가로등이 졸고 있는 역사 밖에는 펨푸로 보이는 여자들이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들고 호객행위를 했다. "놀다가세요. 이쁜 아가씨 있어요." 말을 할 때마다 그녀들의 입에서는 하얀 김이 뿜어 나왔다. 남자들은 팔을 잡은 여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몸이 오싹 할 정도로 추운 늦가을 새벽은 그렇게 겨울의 문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 무렵은 하얀 증기를 내뿜는 기차에서 디젤열차로 바뀌어 가던 시점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었다. 1968년의 일이다. 지리교사인 이석구 선생(작고)은 수업시간이면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게 했다. 이 해에는 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넘어와 나라 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곧 이어 향토예비군이 결성되고 고등학교에 교련이 실시되었다(1969).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을 때, 첫 미술시간의 일을 잊지 못한다. 미술수업을 미술반에서 했는데, 선배들이 남긴 목탄으로 아그리퍼를 그렸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장발을 멋지게 기른 오수웅 선생이 그림을 들여다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 뭐가 되겠는데....."하고 지나갔다. 당시 일학년 미술담당은 최영균 선생이었다. 환갑을 넘긴, 뚱뚱한 체구의 선생님은 마음이 좋고 너그러워 우리들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동양화와 서예를 하셨는데, 묵향이 좋아 나는 선생님의 곁에서 한참동안이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선생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몇 년 뒤였다.
그 날,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린 우리 미술반 일행은 버스로 갈아타고 홍대 앞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본 홍대 캠퍼스는 좁았다. 운동장 위에 철판으로 만든 둥근 콘센트 건물이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그렸는지는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나중에 상장이 도착하여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조회시간에 이 상장을 받았다. 한국근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이마동 학장의 명의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나의 중학교 시절, 미술반은 실습 동(棟)에 있었다. 당시 평택중학교는 평택종합고등학교와 같은 캠퍼스 안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지은 듯한 본관은 고풍스런 목조건물이었다. 그 뒤에 콘크리트로 지은 실습동이 있었다. 그 사이를 구름다리가 연결했다. 교사(校舍) 여기저기에는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 중에는 풍경을 그린 임송희 선생의 동양화도 있었다.
당시 평택종합고등학교에는 대학진학을 위한 보통과를 비롯하여 상과, 전기과, 기계과, 건축과, 농과, 가정과가 있었다. 미술실로 가기 위해 실습실 복도를 지나갈 때면 가정과 여학생들이 만든 자장면 냄새가 나곤 했다. 미술실 옆으로 도서관으로 통하는 뒷문이 있었는데 그 문으로 흰 블라우스에 검정스커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처녀 사서가 드나들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하루는 형사가 나를 찾아왔다. 미술반 지도교사인 여선생이 옆에서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 했다. 형사는 내가 공모전에 낸 포스터를 문제 삼았다.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과 그 위에 그린 낫과 망치(공산당 마크)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본 딴 것이라고 했다. 이 일은 내가 문제의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증거로 제시했기 때문에 무사히 풀렸지만, 당시의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를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나는 지금도 무엇에 한번 빠지면 다른 건 다 잊는 버릇이 있는데, 원 없이 공부를 안 한 때가 중학교 1-2학년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아예 가방을 안 가져가고 화구 박스만 들고 등교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공부의 바닥을 보았다. 자생적인 깨우침이 온 것은 중삼 1학기였다. 너무 노니까 지식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때부터 방과 후에 도서관에 박혀 밤늦게까지 살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상(李箱)을 만났다. 그것은 거의 운명적이었다. 전위(avant-garde)에 대한 나의 열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큰 형수가 시집을 오면서 지참한 물건 속에 <한국단편문학전집 2, 白水社 刊, 1968>이 있었다. 거기에 김유정과 함께 이상의 소설, 시 등이 실려 있었다. 고향집의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나는 이상을 탐독했다.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어렴풋이 집히는 게 있었다. 나는 점차 그 세계에 빠져 들었다. 이상의 세계는 훗날 내 감수성의 젖줄이 되었다. 이상이 두 번째로 내게 다가온 것은 대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1974년 2월이었다. 당시 <문학사상>이 많은 자료를 발굴하여 이상의 사진 화보와 함께 '이상특집'을 발간했다.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문종혁 씨는 이상의 화우였는데, 그의 증언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얼마 전에 아르코미술관에서 '이상 1백주기 특별 전람회 <李氏의 출발>을 기획했는데, <문학사상>의 이 특집호가 참고문헌에서 누락된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중 학시절, 나는 극심한 방황기를 겪었다. 누군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이렇다할 사건 없이 보냈을까만 내 경우엔 유독 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댄디즘(dandyism) 비슷한 것이었으며, 치열한 열병이고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어렵게 입시공부를 해서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미술반에 등록을 한 뒤로는 멋을 부리며 건달 생활을 했다. 당시 학생 사회에는 쏘울 춤이 유행을 했다. 이 무렵 춤에 빠져 본 사람은 "울리 불리", "기타맨", "샹하이 트위스트"가 얼마나 어린 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지 알 것이다. '고고(GO GO)"는 좀 지나서 유행을 했지만, 당시 쏘울 춤은 내게 종교요 신앙이었다. 이 사진의 맨 오른쪽이 나인데, 신문을 5센티 넓이로 접어 넣은 러시아 병정 모자 같은 교모에 흰색 폴라 티, 나팔바지, 검정색 단화 일습을 갖추고 있다.
그 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 중에 김0규가 있었는데, 그 애의 집이 학교 앞 비전리 삼거리 부근에 있었다. 당시 그의 홀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훗날 내가 대학에 진학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게 뒤편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본 그의 얼굴은 이미 도인의 그것에 가까웠다. "어떻게 지내냐? " 내가 묻자 그는 빙긋 웃더니 눈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기,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봉창 문에는 딱 책받침 반 크기 정도의 찢어진 구멍이 있었다. "저거 보는 재미로 산다." 구멍 너머로 앞집의 수도가 보였다. 마침 그 집의 주부가 정면을 향해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치마 사이로 붉은 색 팬티가 선명했다. "재수가 좋으면 하루에 두 번도 봐." 녀석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는 왜 내 사진을 수십 년이나 간직했을까? 기독교에 심취했던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기도하며 팔남매나 되는 형제들을 모두 인가 가정으로 만들었다. 단, 우리 가족만 빼고. 초등학교 사학년 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천안의 성거산 집회에 간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운집한 대규모 집회였다. 나는 기도에 몰입을 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 보다는 철야를 할 때 산 너머로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더 좋았다. 나는 숲을 뒤져 산 도라지나 캐면서 일주일간의 기나 긴 집회 기간을 보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머니는 내게 무엇을 하지 말라 이른 적이 없었다. 그냥 빙긋이 웃으실 뿐이었다. 이 무렵 내가 어머니의 속을 몰랐던 것은 어머니가 그 속내의 깊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언젠가 들여다 본 수 십 길의 컴컴한 우물 속처럼 깊고도 단단한 속마음. 세월은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그 속을 조금 보여주는 수도 있지만, 모르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말로 어떻게 마음을 설명할 것인가. 그나저나 김0규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과연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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