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33("Into the Memory" Series 33)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33("Into the Memory" Series 33)
수학여행의 추억과 팝아트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렸던 1967년 당시 나는 시골의 국민학교 6학년생이었다. 훗날 미술대학에 진학을 해 ‘한국현대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이 해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알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사건과는 무관하게 중학교 입시를 코앞에 두고 책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비록 나중에 일제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 명칭을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꾸긴 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용어에 대해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지금도 눈에 삼삼한 것은 충청도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던 때의 추억이다.
 그 무렵 내 또래의 시골 아이들이 대개 그랬듯이, 나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하얗게 밝혔다. 그리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코끝에 닿는 새벽 공기의 싸늘함을 느끼며 역에 이르는 10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갔다. 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늦가을의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떨며 어둠 속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기차는 ‘칙칙폭폭’ 하며 코에서 하얀 증기를 내뿜는 시커먼 증기기관차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차가 멀리서 기적 소리를 내며 플랫폼에 들어서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 “이제 드디어 고대하던 서울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 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해서 둘러본 서울은 한 시골 초등학교 아이의 눈에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충청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팝’과 관련된 각별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내가 자란 마을은 면사무소가 있는 성환과 경기도 평택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미군기지촌이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 약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는 혼혈아들이 간혹 눈에 띄었고, 수업이 끝나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그 애들을 따라다니며 “미국놈, 미국놈” 하고 놀려대곤 했다. 그런 아이들의 놀림에 키가 크고 힘이 센 혼혈아들은 대항을 했지만, 저학년 여자 아이들이나 몸이 작은 남자 아이들은 훌쩍거리며 울 뿐이었다. 일부 눈치가 빠른 혼혈아들은 학교에서 힘깨나 쓰는 고학년 아이들에게 미제 물건을 주며 호감을 사려고 했다. 그 물건이란 게 고작 쓰고 버린 플라스틱 샴푸 통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물을 담아 사용하면 훌륭히 물총을 대신했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그것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마을 앞동산 굵은 참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동네 종으로 쓰던 포탄의 탄피다. “댕,댕,댕,댕......” 일년에 한 두 번 쯤 동네 누구네 집에 불이라도 나면 그 종은 차가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빠른 템포로 울곤 했다. 그것은 또 동네 청년이 징집을 당해 군대에 가면 “댕...댕...댕...댕”하고 느리게 울었다. 그러면 종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아침 식전에 동구 밖 언덕에 하얗게 모여 만세삼창을 불렀다.
 동네 종은 6.25전쟁이 남기고 간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6. 25전쟁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미군주둔이라는 선물을 한국사회에 남겼다. 나이가 어린 내 또래의 아이들은 처음에는 혼혈아의 존재에 대해 영문을 잘 몰랐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회 교과서에 나온 역사를 통해 점차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네댓 살 때 처음 본 방물장수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 들어있던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생긴 미제 물건들을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솔이 있는 부분을 투명 셀로판지로 덮은 곽 속에 담긴 칫솔이며, 코를 대고 맡으면 상큼한 냄새가 나는 세수 비누와 샴푸 등등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미제 상품들의 이미지는 주로 디자인과 관계된 것이다. 당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미제 물건을 팔던 그 아주머니는 타동네의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기도 했고, 혼기가 찬 젊은 남녀들의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기도 했다.
 팝과 관련된 나의 또 하나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송병수의 소설 <쑈리킴>과 관련된 것이다. 미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할로 쪼꼬렛!’을 외치곤 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을 오십대 후반의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의 의미를 잘 알리라. 국도 변에 어쩌다 미군 병사들이 탄 트럭이라도 서 있으면 아이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들곤 하던 그 쓰라린 추억을.
 어쩌다 미군들이 탄 트럭이 마을 앞 국도를 지나가면 아이들은 트럭을 향해 ‘할로 쪼코렛!’을 외치곤 했다. 그러면 미군들은 먹을 것을 그냥 곱게 주는 법이 없었다. 꼭 도로변의 수풀이나 도랑 같은 후미진 곳에 던져 줍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곤 했다. 하루는 미군 트럭이 국도에 놓여 있는 다리 근처에 서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여 들자 미군병사 하나가 냅킨에 싼 샌드위치를 다리 밑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옷을 입은 채로 그걸 건지러 가슴팍까지 차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장맛비에 냇물이 불어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비록 사람들의 무리 속에는 어른들도 몇 명 섞여 있어 안심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무사히 샌드위치를 건져가지고 나왔고, 그 순간 트럭에서는 미군병사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휘파람 소리에 섞여 터져 나왔다. 
 1957년 작인 송병수의 <쑈리킴>은 전후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기지촌의 삶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기지촌에 사는 전쟁고아들의 신산한 삶을 다룬 이 소설은 주인공인 쑈리킴의 눈을 통해 본 기지촌 사람들의 처절한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초컬릿’과 ‘씨레이션’은 당시 미국의 군대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한국의 팝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양공주 따링의 발에 신겨진 구멍 난 양말처럼 남루하고 누추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팝 뮤직이 용산의 미팔군 클럽 무대에서 태동하고 성장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에는 서양 냄새가 난다고 내치기에는 너무나 끈끈하고 신산했던 우리네 삶의 숨결이 녹아 있어 차라리 보듬고 아끼는 편이 더욱 맘이 편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한국 팝의 지난한 역사는 서양인의 삶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란 점에서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비판보다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망가진 삶이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라고, 이젠 너무 늙어서 힘이 없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철없는 양공주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란 다시 살거나 고쳐 쓸 수 없는 매 순간의 실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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