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Alexander Calder (1898 – 1976) Morning Cobweb [intermediate maquette] 1967 sheet metal, bolts and paint 64 x 40 1/4 x 40 inches 162.6 x 102.2 x 101.6 cm ⓒ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 Resource, N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 Alexander Calder (1898 – 1976) Descending Spines 1956 sheet metal, wire and paint 58 x 72 x 48 inches 147.3 x 182.9 x 121.9 cm ⓒ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 Resource, N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Alexander Calder (1898 – 1976) The Flame 1967 sheet metal, wire and paint 37 x 60 inches 94 x 152.4 cm ⓒ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 Resource, NY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1898 - 1976)

작품 세계
알렉산더 칼더(1898-1976)는 20세기 전반을 아우르는 작품 활동을 통해 현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조각가로 찬사를 받는 작가이다. 체계적 예술 교육을 받은 저명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칼더는 그의 혁신적인 천재성을 통해 현대 미술의 추이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의 조각가로써의 행보는 철사를 비틀고 구부려 공간에 입체적 형태를 ‘그려내는’ 새로운 조각법의 발전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칼더는 부유하는 추상적 형태들이 변화하는 움직임 속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는 모빌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며 볼트와 강철판을 사용한 대형 야외 조각들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오늘날 그의 거대한 작품들은 전세계 도시의 공공장소를 빛내고 있다.
모빌은 움직임(motion)과 동기(motive)의 의미를 지니며 1931년 마르셀 뒤샹에 의해 그 명칭이 주어졌다. 조형 형태에 다양한 속도, 유형 및 진폭이 결합된 움직임을 부여하고자 했던 칼더는 초기 모터가 장착된 추상조각을 시작으로 이후 바람과 공기의 흐름에 의해 움직이는 단순한 구조의 조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러한 후기 모빌은 와이어 프레임 맨 끝 부분에 매달린 다양한 오브제들의 무게와 균형이 섬세하게 평행을 이루며 공간 내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해 ‘백조와 같은 우아한’ 움직임을 지닌 ‘물질과 생명 중간쯤’이라고 표현된 모빌은 스스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작가의 움직임에 대한 신념과 관심을 대변한다.

모빌과 달리 움직이지 않는 조각인 스테빌은 1932년 장 아르프가 모빌과 차별화하기 위해 제시한 이름으로 칼더의 모빌과 스테빌은 이 둘의 조합된 형태인 스탠딩 모빌로 한층 발전한다. 칼더는 조각에 통속적으로 사용되던 좌대를 지양하고 대신 조각의 일부분인 받침대를 선호하였다. 또한 1930년대 중·후반 파리에서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되며 그의 조각은 더욱 유연한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 중 (1940)는 칼더의 스테빌 중 손꼽히는 초기 걸작으로 스탠딩 모빌이 지닌 피라미드와 각진 형태의 받침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알렉산더 칼더는 189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조각가의 손자이자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1923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하여 4년 간 회화를 전공하였다. 192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작가는 나무와 철사를 사용해 움직이는 장난감과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칼더의 서커스’라 명명된 작품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1928년 뉴욕 베이헤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주로 파리에 거주하던 칼더는 호안 미로와의 교우 관계를 통해 중요한 영향을 받게 된다.

칼더의 예술적 방향은 1930년 피에트 몬드리안의 스튜디오 방문을 계기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며 1931년에는 다른 비구상 작가들과 함께 추상 창조(Abstraction-Creation) 그룹에 참여하게 된다. 칼더는 손이나 작은 전기 모터로 움직일 수 있는 조각들을 만들었으며 뒤샹에 의해 모빌이라는 명칭이 주어진 이러한 작품들은 1934년부터 기류에 의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조각들로 확장된다. 이후 조각가 장 아르프는 칼더의 부동적 조각들을 일컬어 스테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길 제안한다.

1933년 이후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던 칼더의 회고전은 1943년 뉴욕 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1964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1976년 휘트니미술관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주요 수상 내역으로는 1952년 베니스비엔날레 최우수상과 1958년 피츠버그 카네기국제전 1등상이 있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만들어진 그의 작품 대부분은 커미션을 통한 야외 설치용 대형 공공 조각들이 주를 이루었다.

칼더의 선구적 발명품인 모빌과 스테빌은 작가 살아생전은 물론 1976년 작고 후에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은 딱딱한 고정적 오브제가 아닌 유연한 연결 고리로 이루어져 조각의 관습적 개념을 바꾸어놓았으며 그의 기지와 획기적인 구성,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의 조화는 키네틱 아트, 추상 조각, 퍼포먼스 아트와 같은 다양한 실험 예술의 성장을 가능케 하였다.

NOIR will include both Stabiles and Mobiles, two of Calder’s most recognizable inventions that evoke graceful movement and zoomorphism. The strong linear quality in Calder’s work coupled with the minimalist color of this show frames the sculpture in the most elegant light, with stark calligraphic forms and kinetic lines activating the surrounding space. The importance of color to the artist is well known and while he experimented with a wide palette, especially in his paintings, there is a limited range of colors most often associated with Calder, primarily black and red. By organizing a show around only black works, Kukje Gallery hopes to shed light on just how important color was to the artist and how paint functions alongside the works’ materiality to manifest their unique and beloved quality.
Alexander Calder (1898-1976), whose illustrious career spanned much of the 20th century, is the most acclaimed and influential sculptor of our time. Born in a family of celebrated, though more classically trained artists, Calder utilized his innovative genius to profoundly change the course of modern art. He began by developing a new method of sculpting: by bending and twisting wire, he essentially “drew” three-dimensional figures in space. He is renowned for the invention of the mobile, whose suspended, abstract elements move and balance in changing harmony. Calder also devoted himself to making outdoor sculpture on a grand scale from bolted sheet steel. Today, these stately titans grace public plazas in cities throughout the world.

어느 미술인의 죽음 고(故) 문희돈 사장의 영전에


▲쿤스트독갤러리에서- 왼쪽부터 홍순환, 윤진섭, 고 문희돈

윤진섭(미술평론가)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해 황망해 하는 수가 있다. 근자에 내가 겪은 일을 꼽자면 고(故) 문희돈 사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불과 1주일 전에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어느 날 뜻밖에도 급성 뇌졸중으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문자가 휴대폰에 뜬 것이다. 그게 한 5월 중순께의 일이다. 병원에 찾아가 보니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 침상에 누운 그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편안해 보였다. 몸에는 여러 개의 호스가 코와 입에 삽입돼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완전한 사망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는 노(老) 부모님의 가녀린 희망이 기계적인 호흡을 유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6월 18일에 만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문희돈 사장은 미술 포털 사이트인 ‘아트다(artda.co.kr)'의 경영자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한국화가로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80년대 후반이니 그와의 교유도 어언 20여 년을 훌쩍 넘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툼한 검정 테 안경에 기골이 장대하여 얼굴이 언뜻 보면 백범 김구 선생을 연상시켰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나를 따랐다.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늘 깍듯하게 대했다. 나 역시 평소건 술자리에서건 때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쓰는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후배처럼 곡진하게 대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돌면 늘 자신은 ‘꼴통’이라고 했다. 꼴통이 뭔데? 하고 내가 물으면 “한번 ‘고(go)’면 영원한 고”라고 설명을 했다. 그 말의 뉘앙스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이어서, 자신이 의리의 사나이임을 은근히 내비치는 특유의 제스처였다.
 문희돈 사장과 나와의 각별한 인연은 2천년, 내가 인사동에서 <서울국제행위예술제>를 기획할 때 비롯되었다. 그 무렵, 마침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 최종후보에 오른 나는 그 일 보다도 행위예술제에 온 정열을 쏟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는 홍순환 선생(현 쿤스트독 갤러리 관장)이 마침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행위예술제는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지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바로 문희돈 사장이었다. 그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행사가 크게 성공을 하여 KBS, MBC, SBS 등 3대 TV 방송의 저녁 9시 메인 뉴스에 경쟁적으로 보도되자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말했다. “내 언제 너를 크게 도와줄 날이 있을 게야.” 그러나 나는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마음속에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화가로서의 입신을 포기한 그는 화단의 마당발을 자처하며 전시회 소식을 발로 뛰며 알리는 일에 주력을 했다. ‘아트다’는 그렇게 해서 컨텐츠를 늘려나갔다. 특히 ‘전시 후기’라고 이름을 붙인 코너는 뒤풀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으로 인기가 높았다. 유난히 술을 즐겼던 그는 그 외에도 술집 풍경을 자주 올렸는데 그런 장면은 다른 미술 포털 사이트에는 없는 그 특유의 것이었다.
 말년의 몇 해 동안 그는 딜러협회의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미술시장이 탄탄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딜러들이 소임과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딜러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협회의 창립이 불가피하다며 이의 출범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그는 협회의 창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사업의 부진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의 사인이 된 급성 뇌졸중은 모르는 사이에 그의 건강을 갉아먹은 복병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나의 졸시(拙詩)가 있으니 여기에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사랑하는 아우 희돈에게

 문희돈, 너는 평소 입이 걸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따뜻했다.
 가끔씩 쏟아내는 육두문자는 맛 있는 술 안주였고
 네 무식은 곧 유식이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한 너였기에
 너는 내게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때로는 네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너에게서 배운 게 많았기에
우리 모두는 누구의 선생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님일 뿐,
눈물의 강을 건너 환희의 기슭에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리.
세상이 동등의 피륙으로 짜여져 있음을
그 화안한 세상에 그 누가 그 누구보다 잘 났으리.
너는 늘 가난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도와주었다. 한 잔의 막걸리로도
그런데 김구 선생을 닮은 너의 기골도
과도한 스트레스는 이기지 못하였구나.
문희돈, 네가 없이 내 무슨 재미로 통의동 골목을 쏘다니리.
너 없이 마시는 술은 더 이상 재미가 없어. 일어나거라, 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병상을 툭 털고 일어나
통의동 그 허름한 선술집 모퉁이에 앉아
뽀얗게 익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나를 기다리거라.
그리하여 세상에 기적도 존재함을
몸으로 증거하거라.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어렸을 적,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순희 누나가 드디어 시집을 갔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나는 순희 누나가 평택 동삭리라는 곳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벽장 돗자리 밑에 넣어둔 아버지의 돈을 꺼내서 무작정 누나네 집을 찾아 나섰다. 황사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그 때는 누나가 시집을 간지 다섯 달 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진설명: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형의 소풍을 따라간 순희 누나와 함께 성환목장에서. 누나가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다.)
평택은 나의 고향인 천원군 성환읍 수향리 지족향(속칭 지질캥이)에서 이 십리 떨어진 곳이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궁리를 거듭한 끝에 집에 아무런 말도 안하고 누나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벽장 밑 돗자리 밑에 감춰둔 아버지의 돈 20원을 꺼내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발을 하러 동네 이발소로 가는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이발소 옆에 마침 공사 중이던 공민학교 건물의 나무 골조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동네이발소에서 일하는 형에게 말해 외상으로 머리를 깎고 1킬로미터나 되는 버스정류소를 향해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갔다. 바람의 힘은 나를 거의 날려버릴 지경이었다. 뿌연 황사바람에 몰려온 모래가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눈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 이었다. 평택은 혼자서는 초행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 무조건 큰 길로 걸었다. 평택은 전에 엄마나 누나하고 온 적이 있어서 물으면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를 내려보니 막막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삭리를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길을 가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길가에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묻기로 했다. 오징어를 하나 구워달라고 하고 동삭리라는 곳을 아느냐고 아줌마에게 물으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잘 모른다고 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바람은 여전히 드셌고 날은 몹시 추웠다.
 집에 들어가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는 혼이 날까봐 거짓말을 둘러댔다. 순희 누나가 보고 싶어 평택에 갔다는 것, 동삭리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경찰서로 갔다는 것, 경찰이 백차로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줘서 올수 있었다는 것 등등을 조리 있게 말했다. 막내 누나는 백차가 데려다 줬다니까 똑똑하다고 굉장히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보고 싶은 순희 누나를 찾아가려 한 나의 거사(?)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내가 첫 대학입시에 실패를 하고 재수를 할 때인 1974년에 순희 누나는 왕십리에 살았다. 처음으로 서울에 살게 된 나는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는 균명고등학교 앞에 있는 모범독서실(이 독서실이 지금도 있는 것을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보고 놀란 적이 있다)에 적을 두고 낮에는 광화문에 있는 대성학원과 서울미술학원에 다녔다. 일년 내내 다닌 것은 아니고 학비 절감을 위해 한두 달씩 건너 뛰어 등록을 했다. 당시 광화문 학원골목 부근에 코미디언 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뚱뚱이 최용순, 임희춘 씨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점심 때 중국집에 갔는데 서영춘 씨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내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근엄해 보였다. 예상외로 전혀 웃지를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숫기가 없던 나는 인사도 못하고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불렀다. "어이, 보이! 손님께 엽차를 갖다 드려야지." 하면서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당시 50원 인가 하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는 나갈 때 거스름돈을 세더니 반을 접어 남방 윗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서울미술학원과 건너편에 있는 대성학원에 간헐적으로 다니면서 지금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서용선(전 서울대 교수, 화가), 김승연(홍대교수), 김봉준(화가), 이인범(상명대 교수), 고(故) 강용대(화가) 등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미술학원으로는 서울미술학원과 모뉴망이 있었는데, 서울미술학원은 당시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 중이던 전영화 선생(한국화가)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내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송주영인데, 그녀는 경북 대구(?) 출신으로 경상도 말을 진하게 쓰고 전혜린과 고갱을 좋아했다. 광화문 근처의 개인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친구를 찾아 서울미술학원에 왔다가 어찌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개성이 강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여 남자 친구처럼 '이형'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이 송씨였다. 그녀는 그때 이미 삼수인가 사수를 해서 입시는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담배가 골초인데 술은 체질적으로 못 했다. 얼굴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에 집시풍의 옷을 좋아해 한눈에 봐도 예술가 같아 보였다. 그녀는 내가 이듬해 홍대에 입학을 해 한 두 해 정도는 가끔씩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 무엇을 하는지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황학동 성동여고 건너편에 나보다 나이가 한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청주 출신의 화가가 작은 화실을 경영하며 입시생들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는 왕십리 순희 누나네 집이 가까운 관계로 오다가다 들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때 고등학교 삼학년 입시생 중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목판화가 김준권이다. 나는 재수를 해서 머리를 기르고 또 나이보다 노숙해 보여서 김은 나를 깍듯이 형으로 불렀는데, 이듬해에 우리는 같이 홍대에 입학을 했다.
 이 화실에 윤 선생이라고 부르는 삼각지에서 미군을 상대로 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자주 놀러왔다. 그는 화실 원장(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다)과 친구였다. 또 서울미술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우는 홍대 지망의 삼수생 친구도 이 화실에 자주 놀러왔다. 지인들은 몇몇이 더 있었다. 이 화실은 신당동 근처에 한 세 번 정도 이사를 다녔는데, 황학동의 지하실에 세를 살 때는 추운 겨울날 난로도 없이 털옷 속에 발을 집어넣고 동동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홍대 입시를 치루고 나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발표 하루 전 날 송주영이가 화실로 나를 찾아왔다. 이 무렵에는 화실이 길 건너편 건물의 이층으로 이사를 가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혹시나 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보자마자 대뜸 축하한다는 말부터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알았냐니까, 학교의 고위층 부인을 자기가 잘 아는데 부탁을 해서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실제로 합격이 돼 있었다.
 이 소식을 알리러 저녁때 다시 화실에 갔다. 윤 선생, 화실 원장, 디자인 지망의 삼수생 친구 등이 난롯가에 빙 둘러 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가 합격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합격을 했으니 한 잔 사라는 것이었다. 마침 주머니에 오백 원이 있어서 선뜻 그러마고 했다. 당시 오백 원이면 지금 돈 만 원 정도 됐다. 그 정도면 소주 한 잔 못 사랴 했는데 이들이 정작 들어간 곳은 신당동 니나노 집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 진 물,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우선 놀고나 보자. 신나게 젓가락 장단 맞추고 놀다 보니 안주접시가 산더미 같고 소주병이 상 주변에 즐비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놀았을까. 취한 눈을 뜨고 보니 친구들은 간 데가 없고 주인이 돈을 내란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오백 원짜리 지폐 달랑 한 장뿐이었다. 이미 통금에 걸려 누나네 집에 가서 돈을 꾸어올 형편도 아니었다. 사정을 이야기 하니 주인 영감이 그러면 아가씨들하고 한 방에서 같이 자고 내일 날이 밝으면 해결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빨간 불이 켜진 방에서 아가씨 둘 하고 같이 자게 됐는데, 술이 좀 취했지만 잠도 안 오고해서 뒤척이는데 옆에 누운,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어이, 총각. 그림 그려?" "응,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 하는 이야기 들으면 척이지." "그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우리 작은 아버지도 화가야." 나는 그 순간 갑자기 귀가 솔깃해 졌다. "화가? 누구?"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K씨가 자기 작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 그 장미 잘 그리는 화가?" 내가 말했다. "응, 내가 그 집에 가면 장미그린 그림이 많았어." 이런 젠장 K 선생의 조카를 술집에서 만나다니. 나는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 주인 영감이 어서 돈을 가지러 가자고 문밖에서 벌써부터 성화였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신을 발에 꿰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나를 버려두고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을까? 괘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순간, 집히는 게 있었다. 그래 아마 지금쯤 화실에 몰려 있을지도 몰라. 나는 걸음이 굼뜬 주인 영감을 재촉하여 근처의 화실로 향했다. 화실 문을 여니 과연 그들이 있었다. 원장은 없고 윤선생과 삼수생 친구가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연탄난로 불을 손을 쬐고 앉아 있었다. “야,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런 순....”하고 버럭 화를 내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선생이 갑자기 난로에서 벌겋게 단 연탄집게를 집어 들더니 나를 겨누며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홍대에 갔어? 이 새끼, 너 나한테 오늘 죽어볼래?” 순간, 벌건 연탄집게가 나를 향해 날아올 것 같았지만, 짐짓 침착함을 가장하고 맞대응을 했다. 내가 누구냐, 일찍부터 그 세계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너 오늘 사람 잘못 봤다. “얼씨구, 이 친구 봐라.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한 나는 돈이 나올 싹수가 노랗다는 판단을 하고 왕십리 누나에 집으로 가서 돈을 얻어 계산을 치렀다. 몇 시간 뒤 다시 화실에 갔을 때 그 친구들은 이제 완전히 술이 깨서 자신들이 한 일을 사과했다. 취기가 부른 해프닝이었다. 나는 그 사과를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대학에 입학하면서 화실의 존재는 점차 잊혀졌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가슴에  황사바람이 불던 황량한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다.       

이보람 인터뷰


이보람 
인터뷰 _ 김재연
우리는 ‘클릭’하나로 수많은 보도사진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순간의 ‘클릭’으로 누군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풍경사진을 보는 듯 무심코 흘려보낸다. 과연 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고통스러운 얼굴들을 무심코 흘려보내는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작업하는 이보람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국내작가나 해외작가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나요? 
글쎄요. 저에겐 제일 어려운 질문 중 하나입니다. 작업태도 면에서는 프리다 칼로와 루이즈 부르주아에게서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를 배웠습니다. 이 말이 계속 작업의 기준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과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이 아주 좋아졌어요. 전 특히 제단화들을 좋아합니다. 제단화에는 이야기의 장면 장면이 압축되어 있어요. 저는 그 단순함과 직설적인 표현들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인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점도 좋아하고요. 동시에 제단화, 특히 ‘피에타’ (더러 ‘애도’의 한 장면으로 나오는..)와 ‘십자가에서 내려짐’과 같은 그림들에선 슬픔과 고통, 애탄의 감정들이 직설적으로 표현됩니다.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감정들이 이미지로 응축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작업의 영감을 어디서 받나요? 영화나 음악? 아니면 다른 무엇?
아무래도 직접적인 건 희생자를 찍은 전쟁이나 테러 보도사진입니다. 애초에 작업의 영감을 받은 사진 한 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작업과 관련해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하는, 저의 가치관을 만들어 온 모든 경험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딱 집어서 얘긴 못하지만 작은 추억들, 음악들, 영화들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예술 영화를 찾아보는 건 아니고, 상대적이겠지만 ‘적당히’ 대중적이면서 평이 좋은 영화들은 꼭 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수사물 미드들(CIS 시리즈, COLD CASE, LIFE, LAW & ORDER 등)을 많이 봅니다. 2009년부터는 드라마를 보면서 희생자가 나오는 부분을 캡처해서 작업 자료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극이나 연극에 가까운 현대무용에도 조금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티켓가격이 상당한지라 자주 보진 못해요. 가장 최근에 봤던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했던 ‘Can We Talk About This?’입니다. 이 작품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인 거 같아요.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수학이 어렵다’라는 말과 같은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미술=기술로 이해하는 측면이 강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현대미술은 작가 개개인의 생각의 표현이고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작품도 복잡해질 수 있겠죠.
그런데 재밌는 건 작가/작품들이 관객에게 가까워지고자 할 때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어려워지고 난해하게 받아들여지는 거 같아요. 그냥 체험하면 되는 작품인데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거죠.
앞으로의 작업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 번 개인전 때 전시했던 ‘애도에의 애도’ 시리즈와 같이 문자가 들어가는 작업을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료 사진을 주제별로 모으는데, 그 중에 ‘Descending(<-십자가에서 내려짐)’과 ‘Lamentation(애도)’는 한 번씩 전시를 했고 이제 ‘Pieta’가 남았어요. 지금 하나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계속 비슷하지만 좀 더 다듬어지겠죠. 제 작업 자체가 질문이니까요. 넓게 보면 계속 ‘희생자’ 이미지에 대한 작업을 해 나갈 것 같아요.

이번전시에 관한 질문
삶과 죽음에 대한 작품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삶과 죽음이 제 작품에 들어있긴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아닙니다. 어쨌든 작업의 시작은 2003년, 대학교 4학년 때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무수히 쏟아지던 보도사진들을 보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 때 잠깐 손을 댔다가, 일 년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게시판에 ‘이라크 전쟁의 참상’ 혹은 ‘이라크 전쟁의 진실’과 같은 제목으로 사진들이 막 올라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죠. 그저 불쌍하다라는 느낌 정도...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든 의문이 ‘이런 제목들로 올라오는 사진들이 실상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뻔한데도 왜 클릭해서 보는 걸까?’였어요. 그리고 제가 이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때 느꼈던 묘한 기분과 의문 때문에 계속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계속 그런 감정이거든요. 동정심과 함께 오는 죄의식. 그런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도 죄스러운 것. 그런 느낌인 것 같습니다.
제 작품 중에 붓들이 창처럼 세워진 그림들이 있는데, 그것은 저의 그런 죄의식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끝에 붉은 물감을 묻히고 희생자를 향해 세워진 붓들은 마치 희생자를 찔러서 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사실 저의 작업 또한 그들의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어떤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제 작품은 질문 그 자체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이 희생자들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작품은 보도사진의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보도사진은 무엇인가요?
일단 최초로 영감을 줬던 사진은 알리-압바스라는 소년의 사진이에요. 이라크 전쟁 당시 가족을 잃고 본인은 전신 화상에 두 팔이 잘렸어요. 특히 영국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걸로 기억해요. ‘The Ali Abbas Story’란 제목으로 책까지 나왔습니다. 대학원 1년 동안은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이 소년에 대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도사진은 유난히 종교적 이미지-십자가-를 연상시켜서, 돌이켜보면 이후의 제단 위 희생자 그림을 하게 된 것도 이 사진 때문인 것 같아요.
일반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을 이용하는 이유는?
보도사진은 일단 ‘소비’를 위한 사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희생자 이미지란 것이 저에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실 제 작품이 전쟁에 대한 것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제 작업은 전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나 테러, 그리고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소비, 감정의 소비에 대한 것입니다. 제 작품에 그려지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미지가 소비된 후 남겨진 찌꺼기, 혹은 껍질일 뿐입니다. 그래서 화면에서 보도사진의 강한 색조와 명암은 날아가고 밝고 가벼운 플라스틱 느낌의 분홍색과 파스텔톤이 많이 쓰입니다.
작품의 분위기가 종교적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도 담겨 있는지요?
네. 기독교 성화 등에서 보이는 희생자 이미지와 보도사진의 희생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거든요. 그래서 ‘애도에의 애도’ 전시 때, 테이블 위에 ‘Lamentation’으로 분류된 자료사진들과 동일한 주제의 옛 성화들을 섞어서 배치했었습니다.
이미지의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마치 박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중요합니다. 보도사진 속 희생자들은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희생자’로서 존재하는데, 보도의 대상이 됨으로써 개개인의 얼굴을 잃는 건 마치 의식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제단’은 본래 희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단은 숭배되는 대상 이전에 숭배하는 이들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데, 숭배하는 이들은 폭력과 희생으로부터 면제된, 혹은 그러기를 바라는 ‘우리’들입니다. 제단 위에서 ‘희생자’는 기념할 만한 대상이 되어 그들을 타자화, 추상화시키는 ‘우리’와 분리됩니다. 이미 현실은 그들에게서 잘려나갔기 때문에 이 무해한 ‘희생자’가 놓인 제단 앞에서 할 일은 잠시 슬퍼하고 동정하는 것 뿐 입니다.
 
6. 묘사된 것과 달리 배경은 밝은 분홍색인데 배경을 밝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밝다는 것 보다는 분홍색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분홍색은 사랑이나 우정을 상징하지만, 그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색이기도 합니다. 그 역설적인 측면 때문에 분홍색은 현대인의 값싼 동정심, 가벼운 죄의식과 가장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선생님께선 분홍색이 피와 살의 색이 증발된 색이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제 그림은 멀리서 봤을 땐 예뻐요. 분홍에 파스텔 톤이니까요.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분홍색마저 무섭게 느껴진다고들 합니다.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문자 단어들이 있는데 그 문자들의 전하려 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문자들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요?
하얀 리본 위의 문자 단어들은 보도사진에 대한 기사였는데요. 일부러 분절시켜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희생자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저에게 보도기사는 진실의 전달에 실패한,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전달하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오히려 저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리본 이미지도 기독교 성화에서 가져온 것인데요. 원래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제 그림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저 ‘메세지처럼 보이는’ 깨진 문장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요?
무감각.
전시명이 ‘애도에의 애도’였는데 그 ‘애도’란 누구를 위한 애도였는지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앞의 애도는 제가 ‘Lamentation’로 분류한 보도사진 속 인물들의 애도입니다. 뒤의 애도는 그들의 애도에 대한 애도입니다. 하지만 그 애도는 말 그대로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도가 아니라, 습관적이며 무의미하고 가벼울 수밖에 없는 행위로서의 ‘애도’입니다.  그리고 더 들어가자면 그러한 ‘애도’에 대한 애도이기도 합니다.

진정성 없는 우리들의 애도를 애도하는 이보람작가. 이보람작가의 그림들에는 이런 전쟁의 희생자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내면심리가 반영되어 있었다. 작업의 시작점은 희생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보람작가의 작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작업 끝에 나올 이보람작가의 답을 기대해본다.

‘한류3.0’의 핵심은 유럽판 K컬처 아닐까…


티에리 로로가 본 K컬처 쇼크의 가능성
‘한류3.0’의 핵심은 유럽판 K컬처 아닐까…
글 최용일
유럽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K팝 열풍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5월, 또 다른 K컬처 열풍이 유럽을 강타했다. 벨기에의 불어권 공영방송인 RTBF가 ‘한국 음악인의 불가사의’라는 제목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나 방영한 것 자체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5월 19일과 27일이 세계 최고 권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개막일과 폐막일이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울러 네덜란드어권 공영방송 VRT도 조만간 이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며 유럽 전역을 상대로 하는 예술 채널 아르테의 방영도 추진되고 있다니 어느 선까지를 이례적이라고 해야 할 지… 이른바 ‘K컬처 쇼크’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영화적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유럽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활동과 성공의 이면에 대한 현지인들의 높은 관심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한국 음악인들의 성공의 비결을 마침내 알아냈습니다"라는 멘트로 시작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만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감독을 맡은 RTBF의 음악 고문 티에리 로로(54) 씨는 "한국 음악인들이 마치 산사태처럼 몰려 와 유럽 음악계를 휩쓸자 많은 사람이 이를 불가사의라고 부르며 그 배경을 물어 왔고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불과 지난 10여 년 사이에 유럽에서 한국의 음악인들에 의해 이뤄진 ‘경이로운 변화’의 배경을 캐고 화면에 담기 위해 지난 1년 간 한국과 벨기에는 물론 한국 음악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학지 독일 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 3대 콩쿠르의 하나인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촬영ㆍ방영을 주도해온 로로 고문은 오는 8월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 2010년 벨기에의 세계적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영화로 '제천 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받은 지 2년 만이다.
로로 고문에 따르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경우 15년 전만 해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인 참가자들이 근년 들어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1차 예선 진출자 중 23.7%를 차지한 한국인 가운데 4명이 결선에 올랐다. 2010년에는 성악부문 1차 진출자의 29%를 차지한 한국인 중 5명이 결선에 진출했는데, 한 나라의 출전자가 결선 진출자 12명 중 5명을 차지한 것은 대회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소프라노 홍혜란이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으며, 작곡 부문에선 한국인이 2회 연속 우승했다.
퀸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다. 2011년 7월1일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남녀 성악 부문에서도 한국인이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피아노 부문에서 2, 3위, 바이올린 부문에서 3위에 오르는 등 5명이 한꺼번에 입상했다. 이에 로로 고문은 매년 또는 2-3년마다 열리는 세계 주요 국제 클래식 경연대회(콩쿠르) 50여 개의 지난 수십 년 간 예선과 결선 진출자, 분야별 우승자의 국적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5년 이전엔 세계 주요 콩쿠르에서 결선에 진출한 한국인은 극소수였지만, 최근 들어 한국 음악인들의 성과는 크고 작은 콩쿠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98년부터 16년 동안 50여 개의 세계 주요 국제 클래식 경연대회의 결선에 진출한 한국인이 모두 378명이었고, 이 가운데 60명이 1등을 차지하며 다른 나라들을 압도했다(그림 참조).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이 결선 진출 또는 우승한 분야 중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3부문이 90%를 차지한다는 재미있는 내용도 있다.
최근에는 또 한국의 젊은 클래식 음악가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나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클래식 부문을 휩쓴 데 이어서 발레 무용수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콩쿠르를 휩쓰는 등 한국 예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특별히 K컬처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K컬처와 더불어 한국 문화가 주는 파급력을 상징하는 ‘K컬처 쇼크(K-culture Shock)’라는 표현이 등장한지도 오래다. 이미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해외 진출은 이미 오래된 얘기고(이를 ‘한류1.0’이라고들 한다), K팝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전역과 미주대륙에까지 확산되고 있으며(‘한류2.0’), 영화와 드라마, 대중음악에 이어 클래식음악, 무용 등 문화계 다방면에 걸쳐 한국의 문화(K-culture)가 주목받기 시작한 현상을 ‘한류3.0’이라고들 한다.
“원래부터 이렇게 잘했나요?” 유럽의 기자들이 한국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라는데, 왜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이쯤 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대체로 궁금해 하는 ‘한국 음악인 성공 키워드’에 대해 영화 제작팀이 알아낸 키워드는 과연 무엇일까. 로로 고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성공 비결은 조기교육과 열정, 치열한 경쟁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일찍부터 음악을 시작하고 한국예술종합원 등이 조기에 영재를 발굴해 훌륭한 스승들이 집중 교육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점과,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학생들이 ‘머리만이 아닌 근육이 음악을 기억할 정도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음악적 기능과 기교는 완벽하게 습득하지만 부족한 자율성과 창의력 등은 독일을 비롯한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유학하며 배우는 것 등의 세 가지로 파악했다.
그는 아무 선입견 없이 취재하고 자신의 판단보다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입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유학을 거쳐 국제 콩쿠르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세계무대에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전형적인 한국 음악인의 성공 코스라는 점을 영화에 담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는 한국 교육의 성취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점들,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교육열과 극심한 경쟁체제, 이에 따른 긍정적ㆍ부정적 현상, 유럽과 달리 가난한 사람은 예술교육을 받기 어려운 한국의 공교육과 사교육의 실상 등도 역시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로로 고문은 벌써 두 가지 면에서 ‘한류3.0’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첫째는 한국의 음악계나 관련 전문지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국제 콩쿠르에서의 한국인 참가기록들을 체계화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조사로서 뿐만 아니라 자료적 가치에 있어서도 한류3.0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평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두 번째 기여는 한국의 예술교육의 강약점, 이른바 SWOT분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분야의 이상과열 현상까지 보이는 조기교육과 유학열풍에 대해 비판적 시선이 아닌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사교육 열풍에서 찾으려 한다. 경제적 궁핍의 이유도, 그래서 결혼이 늦어지거나 기피되고 사회가 노령화되는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문이 예술교육이다.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교육열과 극심한 경쟁체제, 가난한 사람은 아예 예술교육을 받기조차 어려운 한국의 공교육 실상이 예술분야와 체육 분야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사교육 문제를 다루는 어떤 사람도 예체능 분야의 사교육에 대해서는 문제 삼기를 꺼린다. 왜? 거기에는 공교육이 아예 없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사교육 문제를 비판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로의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한예종의 조기 예술교육 참여는 사교육의 일부를 공교육기관이 떠맡는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사교육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교육이나 사교육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제도화된 사교육으로 어떻게 영화에서 지적된 부족한 창의력과 자발성을 어떻게 끌어내느냐, 그래서 유학으로만 돌파구를 찾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문제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영화가 방영되던 5월 27일 끝난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한국인 성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성과에 비하면 미흡했다. 12명이 겨룬 바이올린 결선에 신현수, 김다미 씨와 미국 국적의 에스더 유 양 등 한국인 3명이 진출해서 신 씨와 유 양이 겨우 3, 4위를 하는데 그쳤고 작곡 부문에선 서홍준 씨가 4명의 입상자 가운데 드는 등 예년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로 고문의 평가는 다르다. "결선 진출 자체도 큰 의미가 있지만 신 씨와 김 씨 모두 해외 유학파가 아닌 한국에서 공부한 국내파라는 점에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발전한 것이자 미래를 밝게 해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화에 담겨 있는 한국 음악인의 성공코스 중 유학 과정이 빠져 있는 순수국내파가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얘기였다.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유학하지 않으면 기를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던 자율성과 창의력이 스스로 창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이른바 K컬쳐 쇼크가 더 커졌다는 느낌을 로로 고문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한예종보다 더 확실한 사교육에 대한 대안은 SM 시스템일 것이다. 한류2.0의 도래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SM의 연습생제도와 장기계약시스템은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을 하나로 묶은 것에 불과하다. 어린 연예지망생을 뽑아 혹독한 훈련을 시키며 무려 10년 이상의 노예계약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비등했었고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장기계약이나 혹독한 훈련을 없애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다. 노예성 장기계약이라고는 하지만 연습생 기간 동안 숙식이며, 수많은 교육훈련비용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대한민국 예체능계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과 졸업 후 취업난까지 생각한다면 아이돌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투자하도록 했다면 과연 지금 스타가 된 아이돌 중 얼마나 그 길을 걸었을지 모를 일이다.
연습생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강요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회사에서 일부 강요도 하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 아무런 대가 없이 일만 시킨다면 그대로 따를 사람도 없을 것이고, 연습생 개인들도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반드시 혹독한 훈련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적당히 연습해 세계적인 스타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고시합격에 인생을 걸고, 돈도 안 되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주경야독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고시생이나 예술가의 얘기는 이미 전설에 속하는 얘기고, 교수나 박사가 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열심인 대학원생들과 이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은 설사 그런 특별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단지 취업난 때문에 대학 4년 동안 도서관에서 밤을 낮 삼아 공부하는 대학생들도 다반사다. 그들 모두가 누구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한다. 연예 지망생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예종에서 예술 조기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나 SM엔터테인먼트가 연습생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나 사교육을 제도권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예종의 경우는 사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상급학교가 사교육을 끌어안은 것이며, SM의 경우는 역시 사교육이 지향하는 평생직장이 사교육을 끌어안은 것이라는 점에서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인 셈이다. 여기에 자율성과 창의력의 발현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인 보완만 이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게 로로 고문이 본 K컬처 쇼크의 새로운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충무아트홀



기업과 문화 - 충무아트홀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충무아트홀은 지난 2005년 3월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으로 1,255석의 대극장과 327석의 중극장, 225석의 소극장과 갤러리, 컨벤션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인 뮤지컬과 클래식, 발레 등이 해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마련되며 국내 처음으로 뮤지컬 전문 공연장이라는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을 내세워 출범하였다. 충무아트홀은 하반기 중 7,8월에 태양을 녹일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서울뮤지컬페스티벌과 ‘움직이는 상자’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을 유혹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 충무아트홀이 마련한 낭만 가득하고 짜릿한 문화의 바다로 풍덩 빠져보는 건 어떨까.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님의 문화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의 삶
 □ 충무아트홀과 프로젝트비컴과의 인연_ 그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기관들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각 기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공간의 특성화를 위해 여러 가지의 사업들을 추진했었다. 충무아트홀 또한 취임함과 동시에 충무아트홀의 내부적인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한 내용을 분석해보니 그 중에서도 충무아트홀 갤러리를 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  갤러리 공간의 활성화를 가능케 할 대상을 물색하다 어느 날  프로젝트비컴의 조혜경 기획자와의 만남으로 ‘움직이는 상자’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어떠한 기관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주관자의 마인드와 공간을 활용하는 대상자의 입장이 같았을 경우 일의 결과가 최대치에 도달한다. 그런데 바로 그가 나의 마인드와 비슷한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움직이는 상자’ 전시에 대한 기대치가 생겨났다.
□ 프로젝트비컴의 ‘움직이는 상자’전시에 대한 소감_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의 체험으로 구성된 교육프로그램 전시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의 작가들이 모두들 엘리트 작가들로 초대되어 오프닝 날 상당히 놀라웠다. 이번 전시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마련되어 진 것 같아 뜻 깊고 앞으로 충무아트홀의 전시들이 미래의 체험,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전시로 지속 발전되어져야 한다. 한시적이 아닌 전시장에 항상 사람이 붐비고 이후에 다시금 이 공간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이 공간을 활성화할 수 있는 컨텐츠를 개발해야함과 동시에 갤러리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직원들도 함께 움직이길 바라는 바이다.  
□ 충무아트홀의 비전 및 추진 계획_ 충무아트홀은 설립 초기 국내 유일 뮤지컬 전용 극장이라는 브랜드 전략을 세우며 출범하였지만 현재는 대내외적인 품격을 높이기 위해 클래식과 더불어 상반기에는 발레, 하반기에는 오페라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씩 금난새와 함께하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개최하고 연중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뮤지컬들을 올리고 있다. 중구 한복판에 충무아트홀과 같은 문화복합공간이 있다는 건 참으로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아닌 예술가들조차 이 공간에 오는 마음의 거리가 멀다. 아마도 이 주변의 입지적 여건이 낙후된 부분으로 인해 문화를 관람하는 대상들의 접근이 여의치 않다 판단되어 향후 2025년까지 충무아트홀은 현재의 공연장을 중심으로 미술관과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오페라하우스 안에 고품격 카페몰 팝아트하우스를 건립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충무아트홀은 첫째, 뮤지컬 단독 제작 둘째, 충무아트홀에 올리는 작품은 초연이어야 하며 셋째, 주변 환경의 정화를 통해 보다 고품격 아트홀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계획에 앞서 이번 임기동안 바꿔나가야 할 부분은 충무아트홀 직원들의 마인드를 재정비함으로서 직원들의 혁신, 도전정신, 창의력을 발산할 수 있는 태도를 만들고자 한다. 고로 각 개인의 능력 개발이 우선 선행되어져야 한다.
□ 충무아트홀의 향후 계획_  최근에 충무아트홀은 예그린 어워드의 최고상인 예그린상을 동판으로 제작해 기념하는‘명예의 전당’을 개관했는데 1회 수상자로 국내 최초의 뮤지컬(1966년 작품) ‘살짜기 옵서예’를 작곡한 최창권 선생을 선정하여 그 뜻을 기리고자 했다. 이러한 행사는 올해 처음으로 시작되는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의 행사의 일환으로 오는 8월6일부터 13일까지 충무아트홀에서 개최된다.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은 부산영화제를 통해 한국 영화가 한 단계 성장했듯이 창작뮤지컬을 발전시키는 시발점이 된다 하겠다. 또한 창작뮤지컬의 발전과 세계진출을 위한 공연과 전시 및 부대행사들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많은 분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셔서 우리나라 창작뮤지컬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삶의 발자취 _그동안 우리나라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그리고 충무아트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들을 겪어왔다. 그 중 가장 힘든 시기는 아직 지역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지금의 충무아트홀이 가장 어려운 시점이다. 예산부족, 공간 활성화의 지역적 여건, 직원의 문화 마인드 등이 현재의 풀어가야 할 과제인데 과거 기관들에서 진행했던 후원회를 조성하여 자금을 조성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간 활성화 및 직원들의 마인드가  바뀌어 적극적인 방법들이 진행되는 중이다.  두 번째로 힘든 시기는 성남아트센터를 관장할 당시인데 건물이 건립되기 전에 사장으로 부임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 분당시민과 성남시민의 융화를 위해 다양한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세 번째로 세종문화회관은 첫 민영화로 바뀌는 시점에서 임명되어 그 당시 기관에서 정리되어야 할 대상을 해고해야 하는 일로 시작되어 참으로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6대 사장이었던 예술의 전당은 그 당시 노조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사장 취임과 동시에 노조와의 대담에서 눈물로 호소를 하며 설득한 결과 다행히 나의 의견을 모두들 수긍하여 그 시절을 잘 극복할 수 있었고 추후 퇴임할 당시 모두에게 환대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이 자리까지 왔지만 처음보다 마지막 이 자리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지만 이 또한 과거의 나의 소신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만큼 잘 극복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극장으로 만들고자 한다.



 

생명의 근본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무더기 꽃, 소금장인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


생명의 근본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무더기
,
소금장인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


글 사진, 이대건

빛과 소금, 빛 알갱이 우리 땅 소금 자랑
빛과 소금이라고 했다. 두말할 나위 없다. 생명의 두 가지 근본 조건이다. 생명의 밖에서 작용하는 것이 빛이라면, 한 생명의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소금이렸다. ‘소금을 먹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유기체로 호흡을 멈추지 않고 향상성을 갖는 동력을 얻는다. 그 경계가 0.9%다. 우리 혈액과 세포의 소금농도. 더해도 덜해도 ‘생명유지장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0.9%라는 숫자와 일맥상통하는 한 가지 어휘, ‘양수’다. 생명탄생의 배경에 그 0.9%가 작동하고 있다.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은 한 개인에게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짠맛이 나는 흰색의 결정체,로 시작하는 물질로서 소금의 사전의 정의 한편에는 “물건이 썩는 것을 막고 음식의 맛을 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도덕을 순화ㆍ향상시키는 참신자의 사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네이버 국어사전)”이라는 정의가 덧붙는다. 이 정의 곁에 괄호 열고, 기독교, 괄호 닫고, 라는 부가정보처럼 소금은 종교의 언어다. 소금이 갖는 ‘정화’의 의미 때문이다. 어디 서양의 종교뿐이랴. 우리에게도 ‘소금’은 부정한 것을 중화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가진, 주술의 언어였다.
우리 땅 소금 자랑이다. 갯벌에서 만드는 천일염은 전세계 소금 생산량의 0.1%라고 한다. 육지에서 나는 암염과 같은 소금이 대부분이다. 갯벌 천일염 가운데 86%가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천일염이다. 양으로는 40만여 톤이라고 한다. 미네랄 함량이 높고 염도가 낮아 몸에 좋고 맛이 일품인 소금이, 바로 우리 갯벌에서 일구는 소금이다.
화렴의 천년 전통 위에 태어난 고창 천일염
전라도 고창 땅에는 천년 넘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심원면 월산리 검단마을이라는 지명의 유래담이니, 순전이 허구는 아닐 터다. 검단마을은 내륙으로 17km 넘게 뻗어 들어간 곰소만(고창만이라고도 했다)의 초입에 놓인 자연마을이다. 검단마을의 검단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검단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백제가 나라를 잃자, 그 지역의 일부 백제 중심세력이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게 된다. (고창지역이 백제 근초고왕에 복속된 것은 서기 300년에서 400년 사이라고 한다.) 갑작스레 화전민 신세로 전락한 유민들의 생활이 온전할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운산 인근을 지나는 행인이나, 장사치들과 실갱이가 잦아지기 시작했다(혹자는 유민을 두고, 도적패라고도 한다). 근동에 시시비비가 잦아지자, 선운사 주지 검단선사가 사태해결에 나서게 된다. 방책은 화전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자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일대의 중대사는 ‘호구지책’. 유민들을 만난 검단선사는 ‘먹고사는 일대의 기술’을 전수한다. 소금농사다. 선사의 제안은 주효했고, 유민들은 산을 내려와 심원 바닷가에 마을을 일구고 소금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로부터 가지 치는 천년 이야기가 화렴(火鹽, 일명 자염煮鹽)이고, 선운사 보은염(報恩鹽)이다.
화렴은 태안과 함께 고창에서 다시 복원한 천년 소금제조 방식이다. 화렴이야기만 한보따리, 날이 샐 지경이니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화렴은 사리와 같이 바닷물이 멀리 나가고 가까이 들어오는 물때를 맞춰, 오래 햇볕에 노출돼 염도가 높아진 개펄 흙을 모아 솔가지에 걸러 끓여 만드는 소금이다. 고창 심원에 가면 큰 무쇠 솟을 걸고 소금물을 끓이던 움집이 복원돼 있다. 소금벌막이다.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매년 선운사에 소금을 시주하는 연례행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보은염 이운식이라고 이름지었다. 물경 1400년 전통이라고 한다.
삼양염전과 심원 두어염전의 성쇠
그 소금마을 고창 심원에는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로 조성된 염전이 있다. 지금의 삼양사 염전이다. 조성 당시 100만 평이라던가 200만 평이라던가, 조선 2대 염전이라는 자랑이 아직 남아 있는 염전이다. 당시의 규모는 사라지고 한편은 골프장이 들어서고 한편은 농사를 멈춰 폐염전이 되어가고 있다. 몇 해 전 그 풍경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뭍이면서 물이고 물이면서 뭍인, 겹침공간 염전. 겹쳐 있다는 것은 이편이기도 저편이기도, 혹은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폐(閉)’는 진즉 예정된 것인가. 뭍에서 물로 염전의 물거울 표면을 파르르 흔들며 부는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려, 뙤약볕 아래 늙은 염부들이 은빛 거울 속으로 첨벙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다시 뭍의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폐염전 한 귀퉁이에서 훅훅 거친 숨을 터뜨리는, 아직은 ‘살(殺)’이 아닌 산 풍경을 그린 책이다.”
‘물이면서 뭍인 ‘겹침공간’ 염전의 산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염전(유종인 글·눌와)』의 서평으로 쓴 글이다.
대규모 염전과 조금 떨어진 심원면 두어마을, 삼양사 염전이 만들어지던 시기 엇비슷하게 만들어진 사(私)염전이 있다. 삼양염전이 일제가 전략적으로 조성한 염전이라면 이곳은 개인들이 만들고 농사지은 곳이다. 수만 평 염전가운데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딱 한 개의 염전, 풍산염전(대표 유기봉)을 찾았다. 역시나 풍산염전 또한 화렴 벌막이 있던 자리다.
송홧가루 일렁이는 염판 물거울에 소금 꽃이 피다
소금 팔러 나섰더니 비 온다는 격이다. 예보는 되었으되, 갑작스런 비다. 바닷가 일기려니, 금세 하늘을 가리고 구름이 머리맡까지 낮게 드린다. 쏟아지는 비, 남부에 기승하던 가뭄을 일시에 해갈하는 단비다. 몇 달 며칠 만에 만나는 단비 탓에 염전이 분주해졌다. 비를 몰고 온 꼴이라니, 얼른 장화를 챙겨 신고 소금밭에 뛰어들었다. 부지깽이 하나도 단단히 몫을 하는 여름 소금밭, 걸어 다닐 수 있는 누구든 즉시 변신가능이다. 일꾼모드.
후두둑 지는 빗방울에 땀이 스며 흐른다. 소금밭 아니랄까봐 짠맛이 더하다. 겨우 하루 지은 소금을 소금창고에 지어 부렸다. 그렇게 후다닥 게 눈 감추듯 소금 짐을 부린 사람들이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74세)와 아내, 막내아들 유신(38세) 씨이다. ‘비 오면 소금일은 없어’ 삽시간에 사라진 분주함, 유 대표는 손을 털고 비 탓이다.
백발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단단한 대비를 이루는 그는 벌써 30년 가까이 풍산염전과 씨름해온 장본인이다. “사월 봄볕부터 태워서 이렇게 까맣지, 겨울 나면 또 얼굴 훤~해지네.”
검어지고 희어지고, 30년을 거듭해온 일일 테다. 그가 거듭해온 한해의 패턴이다. 이 장마가 지나 한여름, 가을까지 소금농사는 절정이다. 10월 말이면 농사는 끝, 긴 휴지기로 들어서는 염전을 다스린다. 그리고 겨울나기. 농사준비는 2월부터,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일어난 염전바닥을 다지고, 허물어진 염전 둑을 다시 곧추세운다. 단단한 채비를 마치고 시작하는 본격 소금농사는 4월부터다. 최고의 소금이 나는 오뉴월을 거치며 농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송홧가루 일렁이는 염판 물거울에 소금 꽃이 피고, 소금이 오는 호시절이다.
광물에서 식품으로, 먹을 것 대접받는 천일염
유기봉 대표는 소싯적 고창지역의 메인스트림이었다. 부유한 부친 아래 태어나 유복했으나, 그의 부친이 규모가 큰 간척사업에 손을 잘못 대 가세가 기울면서 그 또한 빈궁한 소년기를 맞는다. 여섯 살 무렵이었다. 그 곤란을 딛고 자수성가한 그는, 고창지역사회 주류 역할을 하며 40대에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한다. ‘정치’라고 하는 단어가 함의하는 수많은 갈래를 몸소 경험한다. 정치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 단위부터 그의 청춘이 함께 했던 것이다. 지방정치의 복판에서 인생의 궤를 맞춰 신명나게 움직이던 그였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도 그러하려니와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두 번의 선출직 선거에서 쓴맛을 본 뒤 그가, 쉰이 다 되어 내린 새로운 인생의 방향이 바로 염전이었다. 소금에서 은근하게 일어나는 다디단 진짜 맛의 세계였다.
“천일염이 얼마 전까지 광물이었소. 식품이 아니고.” 그가 먹을거리로서 천일염 이야기를 붙이며 고향사람 자랑 한 대목 놓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초대 농식품부 장관 정운천 장관이야기다. 그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제안을 받고 두 가지 조건을 들었단다. 그 가운데 한가지가 천일염을 광물에서 식품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다행인 비화(秘話)다. 천일염이 식품으로 분류되고, 관리주체가 농식품부가 되면서 염전에도, 소금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먹을 것’으로 대접받게 된 것.
‘작은’이 주는 끈질긴 생명력, 풍산염전
그의 풍산염전은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 고창갯벌에 있다. 염전의 둑을 넘으면 바로 곰소만(灣), 서해의 갯것들이 웅성거리는 갯벌이다. 염전으로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그 풍산염전은 애초 ‘작은염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풍산염전을 놓고 어깨를 맞대 여러 염전이 있었다. 최근 10여년 새, 염전은 모두 사라지고 혹은 나라에 수용되었다. 풍산염전이 ‘작은’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그 대척점에 있던 ‘큰’ 염전도 마찬가지다. 만의 입구 쪽 풍산염전 바로 옆 서너 배 크기의 ‘큰염전’도 이미 ‘사라진’ 운명을 맞았다. 고창에서 유일한 심원 두어리 사(私)염전 지대에서 다시 ‘유일한’ 사염전 하나로 남은 셈이다. ‘작은’이 주는 이 끈질긴 생명력.
그에게도 사오년 전, 당시 시세에 서너 배에 달하는 거금으로 ‘팔기’를 청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 요구를 물리친 이유는 간명하다. 소금농사는 근본산업이라는 것. 주변의 염전들이 다 그 ‘손’에 넘어간 뒤, 고창갯벌이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다. 근본의 가치가 빛을 발한 것이다.
싱겁고 가볍고 굵은, 풍산염전 소금발
“우리 소금은 싱거.” 그의 소금은 싱겁고 가볍다. 소금 알은 굵다. 소금이 싱겁다니, 짠 게 소금 아닌가? 아니다. 소금에도 짜고 싱거운 정도가 있다. 싱거우니, 달다. 그래서 그의 소금 맛을 본 사람들은 그의 소금만 찾는다. 풍산염전 소금은 비싸다. 근동에서 나는 삼양염전 소금보다 1.5배는 더 나간다.
“한 가족이 일 년에 한가마 먹으면 많이 먹는디, 멫 천원 싸다고 맛없는 소금 먹것능가? 소금 맛 아는 사람들이.” 그의 소금 값 논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금 맛 때문이다.
70대 중반의 나이, 여전히 그는 중앙지와 지방지 한 개씩 신문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지적(知的 혹은 紙的)인 생활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로는 본질을 꿰뚫기 어렵다는 논리다. 활자를 통해서야 깊이 있는 사유가, 행간의 읽기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그의 소금 맛도 그런 그의 삶이 빚은 결과물이다. 앞사람들이 짓던 소금농사법에 조금씩 변화를 주어가며 좀 더 좋은 소금 맛을 찾아 애를 쏟은 결과다. 소금이 달고, 소금이 가벼운 이유는 소금의 도수 탓이다. 또 한가지는 결정지 판 관리에 있다. 서너번 소금을 거두고는 판을 민물로 씻어내리는 것이다. 영업비밀이니,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만,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식은 아니니, 일화 한토막 붙인다. 재작년부터 합류한 막내가 수확량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염전 방식을 빌려오자는 것이다. 아무소리 없이 그러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이 지은 소금과 그가 지었던 소금을 놓고 맛과 결정의 크기, 색을 따져보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소리 없이’ 아버지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소금농사법은 이렇게 대를 이어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30년째 눈에 익은 일을 손으로 익혀가는 젊은 소금농부
유기봉 대표의 곁에는 그 30대 후반의 젊은 아들이 있다. 바로 유신 씨다. 유 대표가 둔 7남매 가운데 막내다. 재작년까지 서울에서 생활하던 그가 손을 털고 가족과 함께 아버지 곁으로,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한해 소금농사를 시작하는 4월, 꽃피는 시절이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서너 살 쯤이었을 거예요. 그 때 아버지가 저기 큰염전을 빌려 농사지을 때였는데, 어머니가 국수를 말아 새참을 나르시면 손을 잡고 같이 오곤 했죠.”
큰염전 작은염전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그 유년의 기억이 촘촘히 스민 공간을 일터로 삼은 것이다. 이제 3년째 손이 서툰 농부련만, 그렇지 않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도와서 하던 일이라, 손에 익어 있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들어오는 물때에 양수기로 물을 퍼 놓는 저수지로부터 난치와 상난치, 그리고 상난치와 수평으로 약한 기울기를 맞춰 염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여러 증발지 판을 거쳐, 해주에 모으는 일이 여간한 눈매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눈에 익혀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해주에 모인 물은, 일정한 도수가 되었을 때야 결정지 판에 올려 소금으로 거둔다. 이 때 결정지에서 소금꽃이 피고, 소금이 온다. 대패로 판을 밀면 수북하게 일어나는 소금, 장관이다.
풍산염전에서 땀깨나 흘리는 염부(鹽夫)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도, 한해한해 검어졌다, 희어졌다를 반복하며 그의 아버지처럼 소금 빛깔을 닮은 흰 머리칼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진짜 염부가 되어갈 것이다. 사전의 정의를 다시 빌지 않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소금의 가치, 그 소금이 만들어지는 근본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게다가 천일염의 가치를 알아챈 사람들이 늘어갈 수록 소금일이 꽤 ‘짭짤한 일’이 될 테니. 소금(salt)이 고대 로마 병사들의 급료를 뜻하는 샐러리(salary, salarium)에서 왔다지 않는가.
사진 설명
유기봉 대표 _ “아유, 난 사진 안 찍어. 천하의 인간극장이 와서도 안 찍었어.” 겨우 그의 옆 모습이다.
상난치 _ 저수지를 거쳐 난치에서 물을 끌어올린 상난치는 수평잡기가 관건이다. 미세한 높이 차이로 자연스럽게 소금물이 해주와 결정지로 흐르게 된다.
증발지1, 2_ 증발지 바닥은 단단하다. 개펄흙을 끓여 단단하게 흙만 남겨서 판을 다진 것이다. 그 위에 소금 알갱이가 앉았다. 안중에 없는 이 소금 대신 결정지에서 소금을 거둔다. 이 판을 거친 소금물이 해주로 모인다.
소금둑길_ 70년 가까이 이 둑길로 소금수레와 염부들의 걸음이 이어졌다.
소품1 _ 소금수레가 판에서 판으로 옮겨 다닐 때 사용하는 나무판이다. 이 판이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
소품2 _ 손에 잡는 긴 대가 없어진 기구다. 밑면에 판이 달려 있는 이 기구로 판의 흙을 다졌다. 지금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판을 다진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흐트러진 판의 흙을 다지는데, 이제는 로울러를 쓴다.
유신 씨 _ 이제 3년차 소금농부, 서툴일이지만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밴 ‘눈가남’이 있다.
갯골/ 둑너머 칠면초  _ 풍산염전 둑을 넘으면 바로 바다로 향하는 갯골, 물이 차면 이 갯골을 따라 바다가 밀려온다. 그 물로 소금을 짓는다. 이 고창갯벌이 람사르 습지다. 그 습지를 채운 칠면초 군락.
메인 _ 유기봉 대표의 막내 유신 씨. 하늘이 낮으니 농사일이 한숨 놓는다. 그가 대패를 놓는다. 비 탓이다. 며칠 일을 대패를 놓고 마무리한다.
도수계_ 풍산염전 소금 맛은 소금물의 도수에 있다. 대나무 대롱으로 만든 이 작은 기구에서 맛의 비밀이 열린다.
해주와 대패 _ 염전의 보물창고가 해주다. 결정지로 끌어올려 소금이 빚어지는 마지막 경유지다. 해주 위에 대패가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대패는 소금 일구는 마법지팡이다. 결정지 판에서 대패질 몇 번이면 피어난 소금꽃이 소금더미로 쌓인다. 오지다. 
소금발/ 소금가마 _ 천일염은 그야말로 하늘과 바람이 짓는 소금, 하늘 낮으면 천하없어도 소금발이 가늘다. 하늘낮은 날 지은 풍산염전 소금발도 천하없다.
빈의자와 전경 _ 풍산염전은 보통염전처럼 저수지부터 결정지까지 일직선 염전이 아니다. 공간효율을 높여 순환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