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한류3.0’의 핵심은 유럽판 K컬처 아닐까…


티에리 로로가 본 K컬처 쇼크의 가능성
‘한류3.0’의 핵심은 유럽판 K컬처 아닐까…
글 최용일
유럽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K팝 열풍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5월, 또 다른 K컬처 열풍이 유럽을 강타했다. 벨기에의 불어권 공영방송인 RTBF가 ‘한국 음악인의 불가사의’라는 제목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나 방영한 것 자체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5월 19일과 27일이 세계 최고 권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개막일과 폐막일이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울러 네덜란드어권 공영방송 VRT도 조만간 이 프로그램을 방영할 예정이며 유럽 전역을 상대로 하는 예술 채널 아르테의 방영도 추진되고 있다니 어느 선까지를 이례적이라고 해야 할 지… 이른바 ‘K컬처 쇼크’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영화적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유럽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활동과 성공의 이면에 대한 현지인들의 높은 관심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한국 음악인들의 성공의 비결을 마침내 알아냈습니다"라는 멘트로 시작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만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감독을 맡은 RTBF의 음악 고문 티에리 로로(54) 씨는 "한국 음악인들이 마치 산사태처럼 몰려 와 유럽 음악계를 휩쓸자 많은 사람이 이를 불가사의라고 부르며 그 배경을 물어 왔고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불과 지난 10여 년 사이에 유럽에서 한국의 음악인들에 의해 이뤄진 ‘경이로운 변화’의 배경을 캐고 화면에 담기 위해 지난 1년 간 한국과 벨기에는 물론 한국 음악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학지 독일 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 3대 콩쿠르의 하나인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촬영ㆍ방영을 주도해온 로로 고문은 오는 8월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 2010년 벨기에의 세계적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영화로 '제천 국제음악영화제'에 초청받은 지 2년 만이다.
로로 고문에 따르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경우 15년 전만 해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인 참가자들이 근년 들어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1차 예선 진출자 중 23.7%를 차지한 한국인 가운데 4명이 결선에 올랐다. 2010년에는 성악부문 1차 진출자의 29%를 차지한 한국인 중 5명이 결선에 진출했는데, 한 나라의 출전자가 결선 진출자 12명 중 5명을 차지한 것은 대회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소프라노 홍혜란이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으며, 작곡 부문에선 한국인이 2회 연속 우승했다.
퀸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다. 2011년 7월1일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남녀 성악 부문에서도 한국인이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피아노 부문에서 2, 3위, 바이올린 부문에서 3위에 오르는 등 5명이 한꺼번에 입상했다. 이에 로로 고문은 매년 또는 2-3년마다 열리는 세계 주요 국제 클래식 경연대회(콩쿠르) 50여 개의 지난 수십 년 간 예선과 결선 진출자, 분야별 우승자의 국적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5년 이전엔 세계 주요 콩쿠르에서 결선에 진출한 한국인은 극소수였지만, 최근 들어 한국 음악인들의 성과는 크고 작은 콩쿠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98년부터 16년 동안 50여 개의 세계 주요 국제 클래식 경연대회의 결선에 진출한 한국인이 모두 378명이었고, 이 가운데 60명이 1등을 차지하며 다른 나라들을 압도했다(그림 참조).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이 결선 진출 또는 우승한 분야 중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3부문이 90%를 차지한다는 재미있는 내용도 있다.
최근에는 또 한국의 젊은 클래식 음악가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나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클래식 부문을 휩쓴 데 이어서 발레 무용수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콩쿠르를 휩쓰는 등 한국 예술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특별히 K컬처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K컬처와 더불어 한국 문화가 주는 파급력을 상징하는 ‘K컬처 쇼크(K-culture Shock)’라는 표현이 등장한지도 오래다. 이미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해외 진출은 이미 오래된 얘기고(이를 ‘한류1.0’이라고들 한다), K팝 열풍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전역과 미주대륙에까지 확산되고 있으며(‘한류2.0’), 영화와 드라마, 대중음악에 이어 클래식음악, 무용 등 문화계 다방면에 걸쳐 한국의 문화(K-culture)가 주목받기 시작한 현상을 ‘한류3.0’이라고들 한다.
“원래부터 이렇게 잘했나요?” 유럽의 기자들이 한국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라는데, 왜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이쯤 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대체로 궁금해 하는 ‘한국 음악인 성공 키워드’에 대해 영화 제작팀이 알아낸 키워드는 과연 무엇일까. 로로 고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성공 비결은 조기교육과 열정, 치열한 경쟁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일찍부터 음악을 시작하고 한국예술종합원 등이 조기에 영재를 발굴해 훌륭한 스승들이 집중 교육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점과,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학생들이 ‘머리만이 아닌 근육이 음악을 기억할 정도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음악적 기능과 기교는 완벽하게 습득하지만 부족한 자율성과 창의력 등은 독일을 비롯한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유학하며 배우는 것 등의 세 가지로 파악했다.
그는 아무 선입견 없이 취재하고 자신의 판단보다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입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유학을 거쳐 국제 콩쿠르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세계무대에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전형적인 한국 음악인의 성공 코스라는 점을 영화에 담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는 한국 교육의 성취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점들,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교육열과 극심한 경쟁체제, 이에 따른 긍정적ㆍ부정적 현상, 유럽과 달리 가난한 사람은 예술교육을 받기 어려운 한국의 공교육과 사교육의 실상 등도 역시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로로 고문은 벌써 두 가지 면에서 ‘한류3.0’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첫째는 한국의 음악계나 관련 전문지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국제 콩쿠르에서의 한국인 참가기록들을 체계화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조사로서 뿐만 아니라 자료적 가치에 있어서도 한류3.0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평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두 번째 기여는 한국의 예술교육의 강약점, 이른바 SWOT분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분야의 이상과열 현상까지 보이는 조기교육과 유학열풍에 대해 비판적 시선이 아닌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사교육 열풍에서 찾으려 한다. 경제적 궁핍의 이유도, 그래서 결혼이 늦어지거나 기피되고 사회가 노령화되는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문이 예술교육이다.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교육열과 극심한 경쟁체제, 가난한 사람은 아예 예술교육을 받기조차 어려운 한국의 공교육 실상이 예술분야와 체육 분야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사교육 문제를 다루는 어떤 사람도 예체능 분야의 사교육에 대해서는 문제 삼기를 꺼린다. 왜? 거기에는 공교육이 아예 없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사교육 문제를 비판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로의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한예종의 조기 예술교육 참여는 사교육의 일부를 공교육기관이 떠맡는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사교육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교육이나 사교육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제도화된 사교육으로 어떻게 영화에서 지적된 부족한 창의력과 자발성을 어떻게 끌어내느냐, 그래서 유학으로만 돌파구를 찾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문제도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영화가 방영되던 5월 27일 끝난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한국인 성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성과에 비하면 미흡했다. 12명이 겨룬 바이올린 결선에 신현수, 김다미 씨와 미국 국적의 에스더 유 양 등 한국인 3명이 진출해서 신 씨와 유 양이 겨우 3, 4위를 하는데 그쳤고 작곡 부문에선 서홍준 씨가 4명의 입상자 가운데 드는 등 예년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로 고문의 평가는 다르다. "결선 진출 자체도 큰 의미가 있지만 신 씨와 김 씨 모두 해외 유학파가 아닌 한국에서 공부한 국내파라는 점에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발전한 것이자 미래를 밝게 해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화에 담겨 있는 한국 음악인의 성공코스 중 유학 과정이 빠져 있는 순수국내파가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얘기였다.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유학하지 않으면 기를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던 자율성과 창의력이 스스로 창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이른바 K컬쳐 쇼크가 더 커졌다는 느낌을 로로 고문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한예종보다 더 확실한 사교육에 대한 대안은 SM 시스템일 것이다. 한류2.0의 도래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SM의 연습생제도와 장기계약시스템은 조기교육과 피나는 노력을 하나로 묶은 것에 불과하다. 어린 연예지망생을 뽑아 혹독한 훈련을 시키며 무려 10년 이상의 노예계약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비등했었고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장기계약이나 혹독한 훈련을 없애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다. 노예성 장기계약이라고는 하지만 연습생 기간 동안 숙식이며, 수많은 교육훈련비용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대한민국 예체능계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과 졸업 후 취업난까지 생각한다면 아이돌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투자하도록 했다면 과연 지금 스타가 된 아이돌 중 얼마나 그 길을 걸었을지 모를 일이다.
연습생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강요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회사에서 일부 강요도 하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 아무런 대가 없이 일만 시킨다면 그대로 따를 사람도 없을 것이고, 연습생 개인들도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니 반드시 혹독한 훈련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적당히 연습해 세계적인 스타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고시합격에 인생을 걸고, 돈도 안 되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주경야독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고시생이나 예술가의 얘기는 이미 전설에 속하는 얘기고, 교수나 박사가 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열심인 대학원생들과 이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은 설사 그런 특별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단지 취업난 때문에 대학 4년 동안 도서관에서 밤을 낮 삼아 공부하는 대학생들도 다반사다. 그들 모두가 누구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한다. 연예 지망생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예종에서 예술 조기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나 SM엔터테인먼트가 연습생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나 사교육을 제도권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예종의 경우는 사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상급학교가 사교육을 끌어안은 것이며, SM의 경우는 역시 사교육이 지향하는 평생직장이 사교육을 끌어안은 것이라는 점에서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인 셈이다. 여기에 자율성과 창의력의 발현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인 보완만 이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게 로로 고문이 본 K컬처 쇼크의 새로운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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