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0, 2012

90세 바라보며 독창회 갖는 테너 홍운표 선생

90세 바라보며 독창회 갖는 테너 홍운표 선생
‘나에게 소리는 생명줄이다’



글 김계옥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 어느 날,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정갈하고 꼿꼿한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잠시 나의 머릿속에는 친정 아버지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연세를 여쭈어 보았더니, 되려 친정 아버지는 연세가 어찌 되셨냐고 물으신다. 75세라고 말씀드렸더니, 무표정하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시면서 “내가 그보다 세 살 밑이여.” 하신다. ‘아, 그러시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차후, 연세가 87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움보다는 선생님의 재치 있는 위트에 친근감과 더불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선생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몇 해 전 아직도 건재해 계심을 확인시켜주는 선생의 음반이 제자들에 의해 <테너 홍운표 애창곡>으로 세상에 나왔다. 뭔지 모를 부드러움과 카리스마가 한눈에 들어오는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서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시냇물 졸졸 흐르는 개울가의 물소리가 아닌 태평양 한가운데서 휘몰아쳐오는 폭풍우의 거대한 힘처럼 거침없는 그 무엇이 온몸을 휘감아버린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 소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하다가 여운을 남기며 천천히 사라진다. 지금의 성량도 저러한데 젊은 시절 선생의 성량이 어떠했는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산타루치아> 열창한 천재 소년
어디서부터 선생의 노래 역사가 시작된 것일까? 어린 시절, 형의 영향으로 음악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선생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깨너머로 배운 <산타루치아>를 열창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천재 소년으로 불리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린 학생의 노래를 듣고 ‘참으로 훌륭한 노래구나’ 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음악을 해야 되겠다는 확신과 함께 부모님을 설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선생의 경우 칭찬은 한 사람의 인생 항로를 바꾸어 놓을 만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음악학교(성악전공)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학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목소리를 낸다는, 그만큼 성량이 풍부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고 한다. 듣는 이에게는 바리톤의 느낌이었으나 워낙 소리가 높게 올라가서 테너로서의 대성을 꿈꾸게 되었단다. 특히 시간만 나면 동경 ‘긴사’에 있는 음악 감상실 ‘겨울나그네(후에로야드)’를 찾아 항상 음악을 들으면서 지낸 것이 음악 공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며 잠시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 회상에 젖는 모습이 더없이 좋아 보인다.
“나는 소리가 미성이고, 체격에 비해 성량과 음량이 풍부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어.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동경예술대에 근무하시던 세계적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끼라는 유명한 선생님이 계셨는데, 노래 표현이 굉장히 동양적이셨어. 그 분은 개인 레슨 안 받기로 유명했고, 학생들을 절대 차별하지 않아서 존경받는 분이셨지. 언젠가 그 분 앞에서 를 불렀는데 내 노래를 듣고 목소리가 좋다며 이탈리아로 가서 음악 공부를 더 하라고 권하셨어. 근데 내가 용기가 없었어. 전쟁이 아니었다면 좋은 기회가 많았을 텐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오는 눈치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무대에 설 수 있는 선생의 모습이 부러움의 대상일 텐데, 선생은 옛 일을 회상하자니 안타까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행복했던 기억들은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법. 새록새록 끄집어내는 기억 속에 선생의 인생 역사가 파노라마 치고 있었다.
1948년 첫 독창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연주를 해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과거 서울중앙방송에서 이인범, 이재영 선생들과 함께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보면서 노래 부르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던 시간이 기억에 남아 있고, 여고에 근무하던 시절엔 출근할 때 교실 1~4층까지 여고생들이 창문을 열고 음악 선생님을 위해 열렬히 환호하던 추억도 생생하다. 그 이후 돈독한 사제지간의 정을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는 선생의 표정에선 그때 그 시절의 환희와 기쁨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소리는 생명이 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이다”
선생의 지난 세월은 가끔씩 들춰보는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한 장 한 장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나이에 무슨 연주를 하냐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선생은 본인의 소리를 연구하며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건강의 비결이기도 하다.
“소리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 소리로 뭔가 전달해 주는 것이야. 소리라는 것은 생명이 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마지막에 공감을 주는 건 감정 표현이지. 관객에게 공감을 줘서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완벽한 연주가 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나는 지금도 가깝게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 지금까지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이 시간에도 건재해 있다고 나는 보고 있어(웃음).”
본인을 믿어주고, 인정해 주면 배로 갚고 싶어진다는 선생은 지금도 하루에 30~40분씩 꾸준히 쉬지 않고 노래 연습에 열심이다. ‘어떻게 하면 소리를 더 잘 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소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킬까’를 늘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은 선생의 생명줄과 같은 것이라고.
그렇다. 자신의 소리를 늘 연구한다는 테너 홍운표의 건재함을 우리는 오는 10월 21일(일) 오후 5시 갤러리 에뽀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연주회를 위해 건강을 염두에 두면서도 매일매일 연습하시는 선생은 껄껄 웃으시며, ‘홍 선생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도록 이 나이에 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여주며 자극제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연주회에서 ‘첫 곡이 생명이기 때문에 관중을 압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찬조 출연이나 다를 바 없다’는 사명감으로 연습에 임한다고.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소리가 옛날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며 어린 아이마냥 환하게 웃으신다.
“사명감을 가진 이 소리가 내 소리라는 걸 말하고 싶어. 60이 넘어서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악계의 자료가 되길 바래. 소리는 극복하는 수련이 필요하거든. 지금 노래를 부르는 것도 꾸준히 연습, 발성이 지속되어야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 후학들에게도 희망을 제시하는 장본인이 되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야. ”

90세에도 무대에 서고 싶다
신동헌 화백의 해설과 피아니스트 김진겸과 함께 하는 이번 연주회에서 우리는 선생의 애창곡이자 주옥 같은 가곡 <옛 동산에 올라>, <가고파>, <산들바람>, <장안사>, <고향의 노래>, <무정한 마음>, <너는 왜 울지 않고>, <별은 빛나건만>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선생의 바람대로 노래라는 공감대로 후학들과 관객들도 소리는 생명이 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이라는 그 뜻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음악이란 예술은 정직하다. 절대 과장할 수 없다’는 확고한 지론을 가지고 계시는 선생은 소질도 없고 의욕도 없는 학생들에겐 단호히 다른 갈 길을 제시한다. 예술은 고난이므로 근본적인 소질, 환경, 위치를 잘 파악해서 몰두해야지 아니면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질 있는 학생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일인자로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해줄 것을 누누이 강조하신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한 길을 걸어오신 테너 홍운표 선생. 음악은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결정체가 하나하나 모여 빛을 발하고, 보석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은은하게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보석이 무엇인지를….
쳐다만 보아도 가슴 시린 파란 가을 하늘을 머리에 두고 긴 시간 내내 자상하신 미소와 함께 음악에 얽힌 인생사를 차분히 풀어주신 선생의 마지막 말씀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음악이라는 무대에 서서 평생 한길로만 왔어.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고, 열정적으로 살아왔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나의 예술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비약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게 후회로 남아. 하지만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소리로 나는 이 자리에 서고 싶어. 이 음악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면 은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 90대에도 나는 무대에 서서 음악회를 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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