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가 ‘피에타’를 부른다면...
B급 문화에 장착한 A급 전략
지금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가히 신드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B급이라 부르고, 또 남들도 그렇게 인정했던 가수 싸이가,
그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적인 B급 문화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강남스타일은 9월 14일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 64위에 진입한 여세를
몰아 1주일 만에 11위에 오르더니 다시 1주일 만에 2위까지 수직상승했다.
그로부터 4주째 2위에 머무르면서 빌보드 차트의 난공불락을 잘 보여주기도 했지만 싸이 이전에 한국 가수들의 빌보드 차트 도전사에 비추어 볼
때, 빌보드 차트의 명불허전을 생각해볼 때 그 성과가 얼마나 기록적인지는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강남스타일은 빌 보드 차트 4주 연속
2위라는 숨고르기를 하면서도 10월 1일 영국의 공식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영국 차트에서 3위로 내려앉은 상태여서 영미
공식차트 동시석권이라는 대기록은 어렵게 됐지만 영미 양국의 공식차트를 모두 차지하는 또 하나의 대기록 달성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
하겠다.
한편, 지난 10월 20일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게재 98일 만에 5억뷰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22일 오전 10시
현재 약 5억 2500만 건을 기록하면서 뮤직비디오 조회수에서 역대 3위에 올랐다. ‘강남 스타일’을 앞선 뮤직 비디오는 현재 약 7억
9000만 건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 팝스타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의 '베이비(Baby)'와 약 6억 1000만
건으로 2위에 올라있는 라틴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의 '온 더 플로어(On The Floor)'뿐이다. 이 밖에도
강남스타일은 9월말 미국, 영국 등 41개국의 아이튠즈 차트 1위를 기록했고 2~5위를 기록한 19개국까지 60개국의 음원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이 한국 최초의 기록이며 또한 모두가 현재 진행형이다.
강남스타일 신드롬은 지금 한국 문화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B급 문화 전성시대의 한 단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B급 문화 전성시대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장악한 음악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도 마찬가지로 도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B급 영화라고 하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품에 안았으며, 또 다른 B급 소재를 다룬 영화 '도둑들'은 10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한국영화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강남스타일 신드롬’과 함께 개그맨들이 주도하는 ‘개가수 신드롬’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개가수’란 얼핏 욕처럼
들리지만 개그맨과 가수의 합성어로 가수같이 노래하는 개그맨이라는 뜻일 뿐이다. 개그맨 유세윤과 뮤지가 결성한 ‘UV’, KBS '개그콘서트'의
신보라·박성광·정태호로 구성된 ‘용감한 녀석들’, MBC '무한도전'의 유재석과 이적이 결성했던 ‘처진 달팽이’, 정형돈과 래퍼 데프콘이 만든
‘형돈이와 대준이’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정통음악이라 부르기 힘든 이들 개가수들의 노래가 음원차트 상위권을 장악하는 현상에서 B급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사실 노래하는 개그맨 가수들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개가수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요새 개가수들은 단순히 인지도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존 노래 가사가 가진 통속성이나 상투성을 뒤집으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과거 탈렌트나 영화배우들이 대중음악과 뮤지컬 분야에
진출하던 트렌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퓨전 스타일이 아닌가 하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장르의 B급 문화 현상으로는 맥락 없이 전개되는 가벼운 웹툰이 수천만 회 이상 젊은이 눈을 사로잡는 ‘병맛만화’를 들 수 있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병맛만화’는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풍자와 조롱의 내용을 담은 만화라는 뜻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생겨난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인 ‘병맛’은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로, 원래 비주류, 저급 문화
콘텐츠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무언가가 수준 이하일 때 '병맛 같은 정치인' '이런 병맛 같은 드라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처음엔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비꼴 때 쓰였던 ‘병맛’이 요즘엔 거꾸로 기발하고 창의적인 행동이나 표현을 칭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맥락도 뜻도 없지만 재밌으면
그만이다. 잘 만들어진 완벽함보다 무언가 조악하고 결핍된 어설픈 그림과 영상이 소위 '찌질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에 '병맛 같다'고
칭찬한다. 주부들이 욕을 하면서 막장 드라마를 보듯, ‘병맛’이라고 지적하면서 즐기는 식이다.
이상에서 국내 문화계에 흐르고 있는 B급 문화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런 관점에서 강남스타일이 국내의 B급 문화 유행에 힘입어 대히트를
친 것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세계적인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내의 B급문화가 이제야 생성되기 시작한 것일 뿐 세계적으로
B급 문화는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되어 하나의 트렌드가 돼 버렸다는 가설이 검증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에 앞서 B급문화를 정의할 필요가 있는데, 저예산이나 범죄, 포르노 영화, 인디음악, 무협지, 판타지소설, 웹툰 등을 정서상 B급이라
부르면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 것 같다. 하지만 B급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고 학술적으로 내려진 정의도 없기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동시상영 영화가 유행했는데, A급 할리우드 영화의 끼워팔기용이 B급
영화(B-Movies)였다. 한물간 스타나 무명배우를 써서 제작비가 싸면서도, 소재와 형식에서는 대중의 즉흥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화였다. 1930년대 등장한 '키치(kitch)' 문화도 B급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키치란 '싸게 만들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verk itschen)에서 유래된 말로 초점은 역시 싼 제작비였지만, 이후 통속 취미에 영합하는 저속한 예술작품으로 확대 해석하고
가벼움, 유치함, 촌스러움 등이 키치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으면서 키치 문화는 일부러 천박한 방법을 동원해 엄숙한 기성예술을 조롱하는
대안문화로 해석되고 있다.
최근에는 B급 판정기준이 돈에서 내용으로 바뀌면서 B급 영화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있다.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145억원의 거액을 쏟아
부은 영화 '도둑들'은 저예산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가벼운 도둑 얘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B급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둑들’은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 수상작인 피에타가 80만도 못 되는 관객을 겨우 동원할 때 1200만을 넘어 관객수에서 국내영화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두 영화 모두 어떤 면에서는 B급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 착안, 국내용 B급영화와 국제용
B급영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자조 섞인 농담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기준으로 철학적인 시각을 들 수 있는데, 철학적 시각에서 B급은 주류 문화에 대한 반감과 새 영역으로의 도전으로 풀이된다.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 문화'나 일본의 오타쿠(御宅) 문화와 같이 고상한 주류 문화가 채울 수 없는 대중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류계층의 문화적 취향도 B급문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실린 신조어
'차브(Chav)'는 집시어 '차비(Chavi·로마어로 어린이를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 하류계층의 문화적 취향을 의미하는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통했다. 이렇게 차용된 차브라는 용어가 세련미와 동떨어진 악취향의 청소년 문화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는데, 번쩍이는 싸구려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짝퉁 브랜드의 야구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이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차브 스타일이다. 그러나 현재는 젊은이의 고유한 문화적 취향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되었다.
과거 B급문화는 소수만의 비주류 문화로 치부됐지만 최근 들어 최상위층 아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는 추세를 보이면서 B급과 A급 문화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과거 어둡고 칙칙하고 냉소적이던 B급 문화에 즐거움과 자부심이라는 새로운 코드가 첨가됨으로써 새로운 A급문화가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저급한 가사와 영상이 웃음거리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음악적 완성도만큼은 A급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세계인의 기본 정서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SNS를 통해 대중을 포섭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기획사는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YG엔터테인먼트였으며, 작곡가 겸 가수인 싸이 역시 B급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탄탄한 조건을 갖췄다. 그런 점에서 치밀한 전략으로 A급이 B급을
흉내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기덕의 피에타 역시 세계가 인정하는 A급 감독이 A급 배우들을 통하여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B급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가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과 잔혹한 현실을 다루면서 9시 뉴스가 더 잔인하지 않느냐는 항변으로 일관하면서 사회나 관객과의
소통을 거부한 면이 없지 않고, 영화계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함으로써 스스로 B급영화의 울타리에 갇히기를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런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싸이의 ‘강남스타일’나 김기덕의 ‘피에타’를 단순한 B급 문화로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강남스타일은 싸이 스스로가 소수에 의한, 소수가 즐기는 성격이 강했던 기존의 음악에 B급 문화에 필수적인 중독성을 찾아내 이를
IT기술과 결합시킴으로써 대중적 흡인력을 극대화시키는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B급 문화가 언어와 사회적 맥락 없이도 전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소수에 의한, 소수가
즐기는 성격의 중독성을 더 많이 채색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발상과 소재를 채택함으로써 상류층 문화에 저항하는 자신만의
자존심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문화창조자는 백남준이 아닐까 싶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백남준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행을 일삼는
예술인' 정도로 치부됐고,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왔다. 백남준이 창시한 비디오아트가 B급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렇지만 A급으로 편입되면서 지금은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백남준과 비슷한 또 다른 예로 팝 아트를 예술로 승화시킨 앤디워홀이 있는데, 역시 김기덕 감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대중들의 포용력은 더 커질 것이며, A급과 B급의 구분이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고, 비주류 문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되는 현상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백남준까지는 벤치마킹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앤디 워홀까지 벤치마킹할 수는 없어 보인다. 반대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넘어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시대적 흐름까지도 충분히 접근했다고 생각된다. B급문화에 장착된
A급의 문화전파 전략이 하나의 신드롬이 되기에 충분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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