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표면과 이면, 그 형식과 의미
고충환- 미술평론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사이. 김석영의 그림은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사이쯤에 위치한다. 주지하다시피 표현주의는 대상보다는 주체에 의미비중이 실리는 편이다. 대상과 주체가 긴밀하게 연동돼 있어서 대상을 주체의 내면으로 불러들여 재차 내뱉어내거나 아예 대상을 참조하지 않고 순수한 상상력만으로 상을,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개는 대상이 있지만, 대상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킬 최소한의 구실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때로 대상이 감각적 닮은꼴의 경계를 벗어나 눈에 띠게 왜곡되거나 해체되거나 재구성되는 것은 이처럼 대상에 작가의 감정이 이입되고 투사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림치고 작가가 이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유독 표현주의에서 그 이입의 정도와 강도는 뚜렷한 편이다. 그래서 정작 대상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에 이입된 작가가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에는 풍경, 꽃, 말, 회전목마, 그리고 부처와 같은 알만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재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작가가 감정을 이입시킬 구실로서 들여온 것이기에 그 결과가 소재 고유의 감각적 닮은꼴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림은 소재 고유의 대상성 내지는 사물성보다는 파토스, 즉흥성, 우연성, 낭자한(격렬한?) 행위의 흔적 그리고 감각적 상상력과 같은 작가로부터 건너간 것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작가의 그림은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 레벨이 표현주의에 가까이 가면 왜곡이 두드러지고, 추상표현주의 쪽으로 쏠리면 해체의 경향이 뚜렷해진다(이에 비해 왜곡은 유기적인 덩어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알만한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눈에 띠게 왜곡된 형상들(혹은 차라리 사물의 구조를 단번에 잡아낸 형상들?), 그러면서도 해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려있는 그림들이 즉흥적이고 우연적이고 감각적인 파토스의 분출 내지는 폭발을 보는 것 같다.
표현주의에는 두 갈래가 있다. 자기 속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고, 자기 외부로 내지르는 경향이 있다. 이 가운데 작가의 그림은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마치 정제되지 않은 날 것 상태 그대로의 형태며 색채를 마구 쏟아낸 것 같다. 형태가 현란한 원색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최소한의 암시적인 경우로만 남겨지는 동안, 컬러풀한 색채들이 그림의 전면에 포치한다. 색채는 당연하게도(?) 사물 고유의 자연색과는 상관이 없다. 때로는 작가의 감정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더러는 회화 자체의 조형원리에 의해서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선택되고 덧입혀지고 내질러지고 뭉개진다. 색채를 칠한다기보다는 아예 색채로 그림을 그리는 식의 일종의 색채 드로잉에 가까운 작가의 그림은 야수파 이후 혹은 동시대적 버전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유형의 나이브 아트로 부를 만하다.
회화의 경계. 회화의 경계는 비록 작가의 전작의 주제이지만, 사실은 전작과 근작 모두를 아우르며 작가의 그림 저변을 관통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암암리에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고, 회화의 프로세스를 체현하고 재구성해 보여주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체현한다? 회화의 본성을 온몸으로 부닥쳐 드러낸다? 작가의 그림은 몸적이고 감각적이다. 캔버스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서 붓질을 휘두르고 색채를 내지른다. 그렇게 날것들로 낭자해진 현장이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고, 회화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했던 존재의 생생한 순간(존재가 오롯해지는 순간)을 알게 한다.
회화에는 회화의 원리가 있고, 현실에는 현실의 원칙이 있다. 회화의 원리와 현실원칙은 서로 상통하면서도 다르다. 현실원칙 없이 회화의 원리가 있을 수 없지만(어떤 식으로든 현실로부터 소재는 건네져야 한다), 한편으로 회화는 자율성이 있기에 때에 따라서 현실원칙 없는 회화도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모든 그림은 일회적인 분출이며 사건이라는(현실 그대로를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탕한 것이 아니라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말이나, 그림은 말(특정 소재)이면서 동시에 노랗고 파랗게 칠해진 평면이라는 모리스 드니의 말, 그리고 그림은 결국 색이라는 마티스의 말이 모두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림 속에 그려진 말이 현실 속의 말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림은 현실 그대로를 가져온다기보다는 현실을 참조하고 간섭하고 들쑤시고 재해석하는 한에서만 현실과 관계 맺는다. 그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또 다른 현실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단 몇 차례의 붓질로서 말의 구조를 단번에 잡아채는 것이나, 무슨 격투라도 벌이듯, 혹여 생생한 순간의 인상이 흩어지거나 퇴색되는 것을 염려하기라도 하듯 부지불식간에 휘두른 붓질과 내던진 색채가 현실 속의 말을 집어삼켜 외관상 현실과 닮았지만 분명 현실과는 다른(어쩌면 현실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를) 종류의 비전을, 세계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말을 그리면서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고, 부처를 그리면서 회화의 과정을 체현한다.
침묵의 소리. 이상으로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형식을 살폈으니, 이제 그 형식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일이다. 작가는 근작에서 여러 모티브를 건드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메인에 해당하는 것은 회전목마며(작가의 그림에서 말과 회전목마는 구분되지도 않고, 그 구분이 의미도 없다) 부처가 될 듯싶다. 침묵의 소리는 작가가 근작에 부친 주제이기도 한데, 아마도 회전목마며 부처가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먼저 회전목마를 보자. 우리의 삶은 회전목마와 비슷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 아무데도 갈 수 없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따라잡을 수도 누구에게 따라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지는 않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한 작가노트를 재인용한 글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언제나 똑같은 자리를 맴돌 뿐 똑같지 않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혹 착각일지 모른다. 따라잡는다는 것도 따라잡힐지 모른다는 것도 모두 착각일지 모른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방법도 없다. 사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모든 개념은 착각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져 있다. 이를테면 세계와 세계의 개념은 다르다. 그리고 어쩌면 세계 자체는 세계의 개념과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개념이 세계를 어떻게 명명하고 호명하듯 세계가 무슨 상관일까, 싶다. 삶이 착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착각도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싸안으면 될 일이다. 너무 속 편한 결론인가. 그 개념 없는(?) 결론이 부처와 연결된다. 색즉시공공즉시색.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현상(착각?)에 지나지가 않는다. 더욱이 작가의 부처 그림은 온갖 현란한 색채로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주제로 봐서 작가는 아마도 그림의 이면을 읽으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림의 형식이 너무 현란해서 그림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작가는 혹 현란한 외장을 역설을 위한 장치로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 석 영
1990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1991 김석영개인전-바탕골미술관.서울
김석영개인전-경남도립문화예술회관.진주
1990~2009 다수의 공모전 및 단체전
2010 “회화의 경계”(김석영2회 개인전)-유나이티드갤러리.서울
2011 서울오픈아트페어(SOAF)- COEX.서울
2011 쾰른아트페어-독일쾰른
2011 대구아트페어-EXCO.대구
2011 “Sounds of Silence”전(갤러리두기획 김석영3회개인전)갤러리두.서울
2011 마이애미아트페어.“Art Asia”전-마이애미.미국
2012 서울오픈아트페어(SOAF). COEX.서울
2012 부산국제화랑미술제(BAMA).센텀호텔.부산.
2012 ‘舞 with 자연’전. 갤러리두.청담동.서울.
2012 ‘길’ 전. 자작나무갤러리.사간동.서울.
2012 ‘곡신(谷神)의 빛’갤러리두 초대 개인전.청담동.서울.
HP 010-9926-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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