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이보람 인터뷰


이보람 
인터뷰 _ 김재연
우리는 ‘클릭’하나로 수많은 보도사진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순간의 ‘클릭’으로 누군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풍경사진을 보는 듯 무심코 흘려보낸다. 과연 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고통스러운 얼굴들을 무심코 흘려보내는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작업하는 이보람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국내작가나 해외작가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나요? 
글쎄요. 저에겐 제일 어려운 질문 중 하나입니다. 작업태도 면에서는 프리다 칼로와 루이즈 부르주아에게서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를 배웠습니다. 이 말이 계속 작업의 기준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과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이 아주 좋아졌어요. 전 특히 제단화들을 좋아합니다. 제단화에는 이야기의 장면 장면이 압축되어 있어요. 저는 그 단순함과 직설적인 표현들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인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점도 좋아하고요. 동시에 제단화, 특히 ‘피에타’ (더러 ‘애도’의 한 장면으로 나오는..)와 ‘십자가에서 내려짐’과 같은 그림들에선 슬픔과 고통, 애탄의 감정들이 직설적으로 표현됩니다.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감정들이 이미지로 응축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작업의 영감을 어디서 받나요? 영화나 음악? 아니면 다른 무엇?
아무래도 직접적인 건 희생자를 찍은 전쟁이나 테러 보도사진입니다. 애초에 작업의 영감을 받은 사진 한 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작업과 관련해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하는, 저의 가치관을 만들어 온 모든 경험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딱 집어서 얘긴 못하지만 작은 추억들, 음악들, 영화들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예술 영화를 찾아보는 건 아니고, 상대적이겠지만 ‘적당히’ 대중적이면서 평이 좋은 영화들은 꼭 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수사물 미드들(CIS 시리즈, COLD CASE, LIFE, LAW & ORDER 등)을 많이 봅니다. 2009년부터는 드라마를 보면서 희생자가 나오는 부분을 캡처해서 작업 자료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극이나 연극에 가까운 현대무용에도 조금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티켓가격이 상당한지라 자주 보진 못해요. 가장 최근에 봤던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했던 ‘Can We Talk About This?’입니다. 이 작품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인 거 같아요.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수학이 어렵다’라는 말과 같은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미술=기술로 이해하는 측면이 강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현대미술은 작가 개개인의 생각의 표현이고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작품도 복잡해질 수 있겠죠.
그런데 재밌는 건 작가/작품들이 관객에게 가까워지고자 할 때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어려워지고 난해하게 받아들여지는 거 같아요. 그냥 체험하면 되는 작품인데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거죠.
앞으로의 작업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 번 개인전 때 전시했던 ‘애도에의 애도’ 시리즈와 같이 문자가 들어가는 작업을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료 사진을 주제별로 모으는데, 그 중에 ‘Descending(<-십자가에서 내려짐)’과 ‘Lamentation(애도)’는 한 번씩 전시를 했고 이제 ‘Pieta’가 남았어요. 지금 하나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계속 비슷하지만 좀 더 다듬어지겠죠. 제 작업 자체가 질문이니까요. 넓게 보면 계속 ‘희생자’ 이미지에 대한 작업을 해 나갈 것 같아요.

이번전시에 관한 질문
삶과 죽음에 대한 작품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삶과 죽음이 제 작품에 들어있긴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아닙니다. 어쨌든 작업의 시작은 2003년, 대학교 4학년 때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무수히 쏟아지던 보도사진들을 보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 때 잠깐 손을 댔다가, 일 년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게시판에 ‘이라크 전쟁의 참상’ 혹은 ‘이라크 전쟁의 진실’과 같은 제목으로 사진들이 막 올라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죠. 그저 불쌍하다라는 느낌 정도...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든 의문이 ‘이런 제목들로 올라오는 사진들이 실상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뻔한데도 왜 클릭해서 보는 걸까?’였어요. 그리고 제가 이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때 느꼈던 묘한 기분과 의문 때문에 계속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계속 그런 감정이거든요. 동정심과 함께 오는 죄의식. 그런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도 죄스러운 것. 그런 느낌인 것 같습니다.
제 작품 중에 붓들이 창처럼 세워진 그림들이 있는데, 그것은 저의 그런 죄의식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끝에 붉은 물감을 묻히고 희생자를 향해 세워진 붓들은 마치 희생자를 찔러서 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사실 저의 작업 또한 그들의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어떤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제 작품은 질문 그 자체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이 희생자들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작품은 보도사진의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보도사진은 무엇인가요?
일단 최초로 영감을 줬던 사진은 알리-압바스라는 소년의 사진이에요. 이라크 전쟁 당시 가족을 잃고 본인은 전신 화상에 두 팔이 잘렸어요. 특히 영국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걸로 기억해요. ‘The Ali Abbas Story’란 제목으로 책까지 나왔습니다. 대학원 1년 동안은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이 소년에 대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도사진은 유난히 종교적 이미지-십자가-를 연상시켜서, 돌이켜보면 이후의 제단 위 희생자 그림을 하게 된 것도 이 사진 때문인 것 같아요.
일반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을 이용하는 이유는?
보도사진은 일단 ‘소비’를 위한 사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희생자 이미지란 것이 저에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실 제 작품이 전쟁에 대한 것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제 작업은 전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나 테러, 그리고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소비, 감정의 소비에 대한 것입니다. 제 작품에 그려지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미지가 소비된 후 남겨진 찌꺼기, 혹은 껍질일 뿐입니다. 그래서 화면에서 보도사진의 강한 색조와 명암은 날아가고 밝고 가벼운 플라스틱 느낌의 분홍색과 파스텔톤이 많이 쓰입니다.
작품의 분위기가 종교적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도 담겨 있는지요?
네. 기독교 성화 등에서 보이는 희생자 이미지와 보도사진의 희생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거든요. 그래서 ‘애도에의 애도’ 전시 때, 테이블 위에 ‘Lamentation’으로 분류된 자료사진들과 동일한 주제의 옛 성화들을 섞어서 배치했었습니다.
이미지의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마치 박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중요합니다. 보도사진 속 희생자들은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희생자’로서 존재하는데, 보도의 대상이 됨으로써 개개인의 얼굴을 잃는 건 마치 의식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제단’은 본래 희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단은 숭배되는 대상 이전에 숭배하는 이들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데, 숭배하는 이들은 폭력과 희생으로부터 면제된, 혹은 그러기를 바라는 ‘우리’들입니다. 제단 위에서 ‘희생자’는 기념할 만한 대상이 되어 그들을 타자화, 추상화시키는 ‘우리’와 분리됩니다. 이미 현실은 그들에게서 잘려나갔기 때문에 이 무해한 ‘희생자’가 놓인 제단 앞에서 할 일은 잠시 슬퍼하고 동정하는 것 뿐 입니다.
 
6. 묘사된 것과 달리 배경은 밝은 분홍색인데 배경을 밝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밝다는 것 보다는 분홍색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분홍색은 사랑이나 우정을 상징하지만, 그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색이기도 합니다. 그 역설적인 측면 때문에 분홍색은 현대인의 값싼 동정심, 가벼운 죄의식과 가장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선생님께선 분홍색이 피와 살의 색이 증발된 색이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제 그림은 멀리서 봤을 땐 예뻐요. 분홍에 파스텔 톤이니까요.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분홍색마저 무섭게 느껴진다고들 합니다.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문자 단어들이 있는데 그 문자들의 전하려 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문자들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요?
하얀 리본 위의 문자 단어들은 보도사진에 대한 기사였는데요. 일부러 분절시켜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희생자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저에게 보도기사는 진실의 전달에 실패한,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전달하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오히려 저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리본 이미지도 기독교 성화에서 가져온 것인데요. 원래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제 그림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저 ‘메세지처럼 보이는’ 깨진 문장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요?
무감각.
전시명이 ‘애도에의 애도’였는데 그 ‘애도’란 누구를 위한 애도였는지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앞의 애도는 제가 ‘Lamentation’로 분류한 보도사진 속 인물들의 애도입니다. 뒤의 애도는 그들의 애도에 대한 애도입니다. 하지만 그 애도는 말 그대로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도가 아니라, 습관적이며 무의미하고 가벼울 수밖에 없는 행위로서의 ‘애도’입니다.  그리고 더 들어가자면 그러한 ‘애도’에 대한 애도이기도 합니다.

진정성 없는 우리들의 애도를 애도하는 이보람작가. 이보람작가의 그림들에는 이런 전쟁의 희생자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내면심리가 반영되어 있었다. 작업의 시작점은 희생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본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보람작가의 작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작업 끝에 나올 이보람작가의 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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