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어렸을 적,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순희 누나가 드디어 시집을 갔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나는 순희 누나가 평택 동삭리라는 곳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벽장 돗자리 밑에 넣어둔 아버지의 돈을 꺼내서 무작정 누나네 집을 찾아 나섰다. 황사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그 때는 누나가 시집을 간지 다섯 달 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진설명: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형의 소풍을 따라간 순희 누나와 함께 성환목장에서. 누나가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다.)
평택은 나의 고향인 천원군 성환읍 수향리 지족향(속칭 지질캥이)에서 이 십리 떨어진 곳이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궁리를 거듭한 끝에 집에 아무런 말도 안하고 누나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벽장 밑 돗자리 밑에 감춰둔 아버지의 돈 20원을 꺼내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발을 하러 동네 이발소로 가는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이발소 옆에 마침 공사 중이던 공민학교 건물의 나무 골조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동네이발소에서 일하는 형에게 말해 외상으로 머리를 깎고 1킬로미터나 되는 버스정류소를 향해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갔다. 바람의 힘은 나를 거의 날려버릴 지경이었다. 뿌연 황사바람에 몰려온 모래가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눈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 이었다. 평택은 혼자서는 초행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 무조건 큰 길로 걸었다. 평택은 전에 엄마나 누나하고 온 적이 있어서 물으면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를 내려보니 막막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삭리를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길을 가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길가에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묻기로 했다. 오징어를 하나 구워달라고 하고 동삭리라는 곳을 아느냐고 아줌마에게 물으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잘 모른다고 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나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바람은 여전히 드셌고 날은 몹시 추웠다.
 집에 들어가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는 혼이 날까봐 거짓말을 둘러댔다. 순희 누나가 보고 싶어 평택에 갔다는 것, 동삭리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경찰서로 갔다는 것, 경찰이 백차로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줘서 올수 있었다는 것 등등을 조리 있게 말했다. 막내 누나는 백차가 데려다 줬다니까 똑똑하다고 굉장히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보고 싶은 순희 누나를 찾아가려 한 나의 거사(?)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내가 첫 대학입시에 실패를 하고 재수를 할 때인 1974년에 순희 누나는 왕십리에 살았다. 처음으로 서울에 살게 된 나는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는 균명고등학교 앞에 있는 모범독서실(이 독서실이 지금도 있는 것을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보고 놀란 적이 있다)에 적을 두고 낮에는 광화문에 있는 대성학원과 서울미술학원에 다녔다. 일년 내내 다닌 것은 아니고 학비 절감을 위해 한두 달씩 건너 뛰어 등록을 했다. 당시 광화문 학원골목 부근에 코미디언 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뚱뚱이 최용순, 임희춘 씨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점심 때 중국집에 갔는데 서영춘 씨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내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근엄해 보였다. 예상외로 전혀 웃지를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숫기가 없던 나는 인사도 못하고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불렀다. "어이, 보이! 손님께 엽차를 갖다 드려야지." 하면서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당시 50원 인가 하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는 나갈 때 거스름돈을 세더니 반을 접어 남방 윗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서울미술학원과 건너편에 있는 대성학원에 간헐적으로 다니면서 지금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서용선(전 서울대 교수, 화가), 김승연(홍대교수), 김봉준(화가), 이인범(상명대 교수), 고(故) 강용대(화가) 등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미술학원으로는 서울미술학원과 모뉴망이 있었는데, 서울미술학원은 당시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 중이던 전영화 선생(한국화가)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내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송주영인데, 그녀는 경북 대구(?) 출신으로 경상도 말을 진하게 쓰고 전혜린과 고갱을 좋아했다. 광화문 근처의 개인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친구를 찾아 서울미술학원에 왔다가 어찌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개성이 강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여 남자 친구처럼 '이형'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이 송씨였다. 그녀는 그때 이미 삼수인가 사수를 해서 입시는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담배가 골초인데 술은 체질적으로 못 했다. 얼굴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에 집시풍의 옷을 좋아해 한눈에 봐도 예술가 같아 보였다. 그녀는 내가 이듬해 홍대에 입학을 해 한 두 해 정도는 가끔씩 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 무엇을 하는지 그 뒤로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황학동 성동여고 건너편에 나보다 나이가 한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청주 출신의 화가가 작은 화실을 경영하며 입시생들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는 왕십리 순희 누나네 집이 가까운 관계로 오다가다 들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때 고등학교 삼학년 입시생 중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목판화가 김준권이다. 나는 재수를 해서 머리를 기르고 또 나이보다 노숙해 보여서 김은 나를 깍듯이 형으로 불렀는데, 이듬해에 우리는 같이 홍대에 입학을 했다.
 이 화실에 윤 선생이라고 부르는 삼각지에서 미군을 상대로 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자주 놀러왔다. 그는 화실 원장(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다)과 친구였다. 또 서울미술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우는 홍대 지망의 삼수생 친구도 이 화실에 자주 놀러왔다. 지인들은 몇몇이 더 있었다. 이 화실은 신당동 근처에 한 세 번 정도 이사를 다녔는데, 황학동의 지하실에 세를 살 때는 추운 겨울날 난로도 없이 털옷 속에 발을 집어넣고 동동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홍대 입시를 치루고 나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발표 하루 전 날 송주영이가 화실로 나를 찾아왔다. 이 무렵에는 화실이 길 건너편 건물의 이층으로 이사를 가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혹시나 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보자마자 대뜸 축하한다는 말부터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알았냐니까, 학교의 고위층 부인을 자기가 잘 아는데 부탁을 해서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실제로 합격이 돼 있었다.
 이 소식을 알리러 저녁때 다시 화실에 갔다. 윤 선생, 화실 원장, 디자인 지망의 삼수생 친구 등이 난롯가에 빙 둘러 앉아 잡담을 하고 있다가 합격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합격을 했으니 한 잔 사라는 것이었다. 마침 주머니에 오백 원이 있어서 선뜻 그러마고 했다. 당시 오백 원이면 지금 돈 만 원 정도 됐다. 그 정도면 소주 한 잔 못 사랴 했는데 이들이 정작 들어간 곳은 신당동 니나노 집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 진 물,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우선 놀고나 보자. 신나게 젓가락 장단 맞추고 놀다 보니 안주접시가 산더미 같고 소주병이 상 주변에 즐비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놀았을까. 취한 눈을 뜨고 보니 친구들은 간 데가 없고 주인이 돈을 내란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오백 원짜리 지폐 달랑 한 장뿐이었다. 이미 통금에 걸려 누나네 집에 가서 돈을 꾸어올 형편도 아니었다. 사정을 이야기 하니 주인 영감이 그러면 아가씨들하고 한 방에서 같이 자고 내일 날이 밝으면 해결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빨간 불이 켜진 방에서 아가씨 둘 하고 같이 자게 됐는데, 술이 좀 취했지만 잠도 안 오고해서 뒤척이는데 옆에 누운,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어이, 총각. 그림 그려?" "응,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 하는 이야기 들으면 척이지." "그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우리 작은 아버지도 화가야." 나는 그 순간 갑자기 귀가 솔깃해 졌다. "화가? 누구?"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K씨가 자기 작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 그 장미 잘 그리는 화가?" 내가 말했다. "응, 내가 그 집에 가면 장미그린 그림이 많았어." 이런 젠장 K 선생의 조카를 술집에서 만나다니. 나는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 주인 영감이 어서 돈을 가지러 가자고 문밖에서 벌써부터 성화였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신을 발에 꿰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나를 버려두고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을까? 괘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순간, 집히는 게 있었다. 그래 아마 지금쯤 화실에 몰려 있을지도 몰라. 나는 걸음이 굼뜬 주인 영감을 재촉하여 근처의 화실로 향했다. 화실 문을 여니 과연 그들이 있었다. 원장은 없고 윤선생과 삼수생 친구가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연탄난로 불을 손을 쬐고 앉아 있었다. “야,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런 순....”하고 버럭 화를 내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선생이 갑자기 난로에서 벌겋게 단 연탄집게를 집어 들더니 나를 겨누며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홍대에 갔어? 이 새끼, 너 나한테 오늘 죽어볼래?” 순간, 벌건 연탄집게가 나를 향해 날아올 것 같았지만, 짐짓 침착함을 가장하고 맞대응을 했다. 내가 누구냐, 일찍부터 그 세계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너 오늘 사람 잘못 봤다. “얼씨구, 이 친구 봐라.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내가 눈을 부릅뜨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한 나는 돈이 나올 싹수가 노랗다는 판단을 하고 왕십리 누나에 집으로 가서 돈을 얻어 계산을 치렀다. 몇 시간 뒤 다시 화실에 갔을 때 그 친구들은 이제 완전히 술이 깨서 자신들이 한 일을 사과했다. 취기가 부른 해프닝이었다. 나는 그 사과를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대학에 입학하면서 화실의 존재는 점차 잊혀졌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가슴에  황사바람이 불던 황량한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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