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생명의 근본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무더기 꽃, 소금장인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


생명의 근본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한 무더기
,
소금장인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


글 사진, 이대건

빛과 소금, 빛 알갱이 우리 땅 소금 자랑
빛과 소금이라고 했다. 두말할 나위 없다. 생명의 두 가지 근본 조건이다. 생명의 밖에서 작용하는 것이 빛이라면, 한 생명의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소금이렸다. ‘소금을 먹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유기체로 호흡을 멈추지 않고 향상성을 갖는 동력을 얻는다. 그 경계가 0.9%다. 우리 혈액과 세포의 소금농도. 더해도 덜해도 ‘생명유지장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0.9%라는 숫자와 일맥상통하는 한 가지 어휘, ‘양수’다. 생명탄생의 배경에 그 0.9%가 작동하고 있다.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은 한 개인에게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짠맛이 나는 흰색의 결정체,로 시작하는 물질로서 소금의 사전의 정의 한편에는 “물건이 썩는 것을 막고 음식의 맛을 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도덕을 순화ㆍ향상시키는 참신자의 사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네이버 국어사전)”이라는 정의가 덧붙는다. 이 정의 곁에 괄호 열고, 기독교, 괄호 닫고, 라는 부가정보처럼 소금은 종교의 언어다. 소금이 갖는 ‘정화’의 의미 때문이다. 어디 서양의 종교뿐이랴. 우리에게도 ‘소금’은 부정한 것을 중화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가진, 주술의 언어였다.
우리 땅 소금 자랑이다. 갯벌에서 만드는 천일염은 전세계 소금 생산량의 0.1%라고 한다. 육지에서 나는 암염과 같은 소금이 대부분이다. 갯벌 천일염 가운데 86%가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천일염이다. 양으로는 40만여 톤이라고 한다. 미네랄 함량이 높고 염도가 낮아 몸에 좋고 맛이 일품인 소금이, 바로 우리 갯벌에서 일구는 소금이다.
화렴의 천년 전통 위에 태어난 고창 천일염
전라도 고창 땅에는 천년 넘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심원면 월산리 검단마을이라는 지명의 유래담이니, 순전이 허구는 아닐 터다. 검단마을은 내륙으로 17km 넘게 뻗어 들어간 곰소만(고창만이라고도 했다)의 초입에 놓인 자연마을이다. 검단마을의 검단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검단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백제가 나라를 잃자, 그 지역의 일부 백제 중심세력이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게 된다. (고창지역이 백제 근초고왕에 복속된 것은 서기 300년에서 400년 사이라고 한다.) 갑작스레 화전민 신세로 전락한 유민들의 생활이 온전할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운산 인근을 지나는 행인이나, 장사치들과 실갱이가 잦아지기 시작했다(혹자는 유민을 두고, 도적패라고도 한다). 근동에 시시비비가 잦아지자, 선운사 주지 검단선사가 사태해결에 나서게 된다. 방책은 화전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자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일대의 중대사는 ‘호구지책’. 유민들을 만난 검단선사는 ‘먹고사는 일대의 기술’을 전수한다. 소금농사다. 선사의 제안은 주효했고, 유민들은 산을 내려와 심원 바닷가에 마을을 일구고 소금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로부터 가지 치는 천년 이야기가 화렴(火鹽, 일명 자염煮鹽)이고, 선운사 보은염(報恩鹽)이다.
화렴은 태안과 함께 고창에서 다시 복원한 천년 소금제조 방식이다. 화렴이야기만 한보따리, 날이 샐 지경이니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화렴은 사리와 같이 바닷물이 멀리 나가고 가까이 들어오는 물때를 맞춰, 오래 햇볕에 노출돼 염도가 높아진 개펄 흙을 모아 솔가지에 걸러 끓여 만드는 소금이다. 고창 심원에 가면 큰 무쇠 솟을 걸고 소금물을 끓이던 움집이 복원돼 있다. 소금벌막이다.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매년 선운사에 소금을 시주하는 연례행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보은염 이운식이라고 이름지었다. 물경 1400년 전통이라고 한다.
삼양염전과 심원 두어염전의 성쇠
그 소금마을 고창 심원에는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로 조성된 염전이 있다. 지금의 삼양사 염전이다. 조성 당시 100만 평이라던가 200만 평이라던가, 조선 2대 염전이라는 자랑이 아직 남아 있는 염전이다. 당시의 규모는 사라지고 한편은 골프장이 들어서고 한편은 농사를 멈춰 폐염전이 되어가고 있다. 몇 해 전 그 풍경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뭍이면서 물이고 물이면서 뭍인, 겹침공간 염전. 겹쳐 있다는 것은 이편이기도 저편이기도, 혹은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폐(閉)’는 진즉 예정된 것인가. 뭍에서 물로 염전의 물거울 표면을 파르르 흔들며 부는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려, 뙤약볕 아래 늙은 염부들이 은빛 거울 속으로 첨벙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다시 뭍의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폐염전 한 귀퉁이에서 훅훅 거친 숨을 터뜨리는, 아직은 ‘살(殺)’이 아닌 산 풍경을 그린 책이다.”
‘물이면서 뭍인 ‘겹침공간’ 염전의 산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염전(유종인 글·눌와)』의 서평으로 쓴 글이다.
대규모 염전과 조금 떨어진 심원면 두어마을, 삼양사 염전이 만들어지던 시기 엇비슷하게 만들어진 사(私)염전이 있다. 삼양염전이 일제가 전략적으로 조성한 염전이라면 이곳은 개인들이 만들고 농사지은 곳이다. 수만 평 염전가운데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딱 한 개의 염전, 풍산염전(대표 유기봉)을 찾았다. 역시나 풍산염전 또한 화렴 벌막이 있던 자리다.
송홧가루 일렁이는 염판 물거울에 소금 꽃이 피다
소금 팔러 나섰더니 비 온다는 격이다. 예보는 되었으되, 갑작스런 비다. 바닷가 일기려니, 금세 하늘을 가리고 구름이 머리맡까지 낮게 드린다. 쏟아지는 비, 남부에 기승하던 가뭄을 일시에 해갈하는 단비다. 몇 달 며칠 만에 만나는 단비 탓에 염전이 분주해졌다. 비를 몰고 온 꼴이라니, 얼른 장화를 챙겨 신고 소금밭에 뛰어들었다. 부지깽이 하나도 단단히 몫을 하는 여름 소금밭, 걸어 다닐 수 있는 누구든 즉시 변신가능이다. 일꾼모드.
후두둑 지는 빗방울에 땀이 스며 흐른다. 소금밭 아니랄까봐 짠맛이 더하다. 겨우 하루 지은 소금을 소금창고에 지어 부렸다. 그렇게 후다닥 게 눈 감추듯 소금 짐을 부린 사람들이 풍산염전 유기봉 대표(74세)와 아내, 막내아들 유신(38세) 씨이다. ‘비 오면 소금일은 없어’ 삽시간에 사라진 분주함, 유 대표는 손을 털고 비 탓이다.
백발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단단한 대비를 이루는 그는 벌써 30년 가까이 풍산염전과 씨름해온 장본인이다. “사월 봄볕부터 태워서 이렇게 까맣지, 겨울 나면 또 얼굴 훤~해지네.”
검어지고 희어지고, 30년을 거듭해온 일일 테다. 그가 거듭해온 한해의 패턴이다. 이 장마가 지나 한여름, 가을까지 소금농사는 절정이다. 10월 말이면 농사는 끝, 긴 휴지기로 들어서는 염전을 다스린다. 그리고 겨울나기. 농사준비는 2월부터,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일어난 염전바닥을 다지고, 허물어진 염전 둑을 다시 곧추세운다. 단단한 채비를 마치고 시작하는 본격 소금농사는 4월부터다. 최고의 소금이 나는 오뉴월을 거치며 농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송홧가루 일렁이는 염판 물거울에 소금 꽃이 피고, 소금이 오는 호시절이다.
광물에서 식품으로, 먹을 것 대접받는 천일염
유기봉 대표는 소싯적 고창지역의 메인스트림이었다. 부유한 부친 아래 태어나 유복했으나, 그의 부친이 규모가 큰 간척사업에 손을 잘못 대 가세가 기울면서 그 또한 빈궁한 소년기를 맞는다. 여섯 살 무렵이었다. 그 곤란을 딛고 자수성가한 그는, 고창지역사회 주류 역할을 하며 40대에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한다. ‘정치’라고 하는 단어가 함의하는 수많은 갈래를 몸소 경험한다. 정치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 단위부터 그의 청춘이 함께 했던 것이다. 지방정치의 복판에서 인생의 궤를 맞춰 신명나게 움직이던 그였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꽃도 그러하려니와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두 번의 선출직 선거에서 쓴맛을 본 뒤 그가, 쉰이 다 되어 내린 새로운 인생의 방향이 바로 염전이었다. 소금에서 은근하게 일어나는 다디단 진짜 맛의 세계였다.
“천일염이 얼마 전까지 광물이었소. 식품이 아니고.” 그가 먹을거리로서 천일염 이야기를 붙이며 고향사람 자랑 한 대목 놓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초대 농식품부 장관 정운천 장관이야기다. 그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제안을 받고 두 가지 조건을 들었단다. 그 가운데 한가지가 천일염을 광물에서 식품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다행인 비화(秘話)다. 천일염이 식품으로 분류되고, 관리주체가 농식품부가 되면서 염전에도, 소금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먹을 것’으로 대접받게 된 것.
‘작은’이 주는 끈질긴 생명력, 풍산염전
그의 풍산염전은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 고창갯벌에 있다. 염전의 둑을 넘으면 바로 곰소만(灣), 서해의 갯것들이 웅성거리는 갯벌이다. 염전으로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그 풍산염전은 애초 ‘작은염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풍산염전을 놓고 어깨를 맞대 여러 염전이 있었다. 최근 10여년 새, 염전은 모두 사라지고 혹은 나라에 수용되었다. 풍산염전이 ‘작은’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그 대척점에 있던 ‘큰’ 염전도 마찬가지다. 만의 입구 쪽 풍산염전 바로 옆 서너 배 크기의 ‘큰염전’도 이미 ‘사라진’ 운명을 맞았다. 고창에서 유일한 심원 두어리 사(私)염전 지대에서 다시 ‘유일한’ 사염전 하나로 남은 셈이다. ‘작은’이 주는 이 끈질긴 생명력.
그에게도 사오년 전, 당시 시세에 서너 배에 달하는 거금으로 ‘팔기’를 청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 요구를 물리친 이유는 간명하다. 소금농사는 근본산업이라는 것. 주변의 염전들이 다 그 ‘손’에 넘어간 뒤, 고창갯벌이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다. 근본의 가치가 빛을 발한 것이다.
싱겁고 가볍고 굵은, 풍산염전 소금발
“우리 소금은 싱거.” 그의 소금은 싱겁고 가볍다. 소금 알은 굵다. 소금이 싱겁다니, 짠 게 소금 아닌가? 아니다. 소금에도 짜고 싱거운 정도가 있다. 싱거우니, 달다. 그래서 그의 소금 맛을 본 사람들은 그의 소금만 찾는다. 풍산염전 소금은 비싸다. 근동에서 나는 삼양염전 소금보다 1.5배는 더 나간다.
“한 가족이 일 년에 한가마 먹으면 많이 먹는디, 멫 천원 싸다고 맛없는 소금 먹것능가? 소금 맛 아는 사람들이.” 그의 소금 값 논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금 맛 때문이다.
70대 중반의 나이, 여전히 그는 중앙지와 지방지 한 개씩 신문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지적(知的 혹은 紙的)인 생활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로는 본질을 꿰뚫기 어렵다는 논리다. 활자를 통해서야 깊이 있는 사유가, 행간의 읽기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그의 소금 맛도 그런 그의 삶이 빚은 결과물이다. 앞사람들이 짓던 소금농사법에 조금씩 변화를 주어가며 좀 더 좋은 소금 맛을 찾아 애를 쏟은 결과다. 소금이 달고, 소금이 가벼운 이유는 소금의 도수 탓이다. 또 한가지는 결정지 판 관리에 있다. 서너번 소금을 거두고는 판을 민물로 씻어내리는 것이다. 영업비밀이니,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만,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식은 아니니, 일화 한토막 붙인다. 재작년부터 합류한 막내가 수확량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염전 방식을 빌려오자는 것이다. 아무소리 없이 그러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이 지은 소금과 그가 지었던 소금을 놓고 맛과 결정의 크기, 색을 따져보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소리 없이’ 아버지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소금농사법은 이렇게 대를 이어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30년째 눈에 익은 일을 손으로 익혀가는 젊은 소금농부
유기봉 대표의 곁에는 그 30대 후반의 젊은 아들이 있다. 바로 유신 씨다. 유 대표가 둔 7남매 가운데 막내다. 재작년까지 서울에서 생활하던 그가 손을 털고 가족과 함께 아버지 곁으로,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한해 소금농사를 시작하는 4월, 꽃피는 시절이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서너 살 쯤이었을 거예요. 그 때 아버지가 저기 큰염전을 빌려 농사지을 때였는데, 어머니가 국수를 말아 새참을 나르시면 손을 잡고 같이 오곤 했죠.”
큰염전 작은염전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그 유년의 기억이 촘촘히 스민 공간을 일터로 삼은 것이다. 이제 3년째 손이 서툰 농부련만, 그렇지 않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도와서 하던 일이라, 손에 익어 있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들어오는 물때에 양수기로 물을 퍼 놓는 저수지로부터 난치와 상난치, 그리고 상난치와 수평으로 약한 기울기를 맞춰 염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여러 증발지 판을 거쳐, 해주에 모으는 일이 여간한 눈매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눈에 익혀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해주에 모인 물은, 일정한 도수가 되었을 때야 결정지 판에 올려 소금으로 거둔다. 이 때 결정지에서 소금꽃이 피고, 소금이 온다. 대패로 판을 밀면 수북하게 일어나는 소금, 장관이다.
풍산염전에서 땀깨나 흘리는 염부(鹽夫)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도, 한해한해 검어졌다, 희어졌다를 반복하며 그의 아버지처럼 소금 빛깔을 닮은 흰 머리칼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진짜 염부가 되어갈 것이다. 사전의 정의를 다시 빌지 않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소금의 가치, 그 소금이 만들어지는 근본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게다가 천일염의 가치를 알아챈 사람들이 늘어갈 수록 소금일이 꽤 ‘짭짤한 일’이 될 테니. 소금(salt)이 고대 로마 병사들의 급료를 뜻하는 샐러리(salary, salarium)에서 왔다지 않는가.
사진 설명
유기봉 대표 _ “아유, 난 사진 안 찍어. 천하의 인간극장이 와서도 안 찍었어.” 겨우 그의 옆 모습이다.
상난치 _ 저수지를 거쳐 난치에서 물을 끌어올린 상난치는 수평잡기가 관건이다. 미세한 높이 차이로 자연스럽게 소금물이 해주와 결정지로 흐르게 된다.
증발지1, 2_ 증발지 바닥은 단단하다. 개펄흙을 끓여 단단하게 흙만 남겨서 판을 다진 것이다. 그 위에 소금 알갱이가 앉았다. 안중에 없는 이 소금 대신 결정지에서 소금을 거둔다. 이 판을 거친 소금물이 해주로 모인다.
소금둑길_ 70년 가까이 이 둑길로 소금수레와 염부들의 걸음이 이어졌다.
소품1 _ 소금수레가 판에서 판으로 옮겨 다닐 때 사용하는 나무판이다. 이 판이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
소품2 _ 손에 잡는 긴 대가 없어진 기구다. 밑면에 판이 달려 있는 이 기구로 판의 흙을 다졌다. 지금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판을 다진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흐트러진 판의 흙을 다지는데, 이제는 로울러를 쓴다.
유신 씨 _ 이제 3년차 소금농부, 서툴일이지만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밴 ‘눈가남’이 있다.
갯골/ 둑너머 칠면초  _ 풍산염전 둑을 넘으면 바로 바다로 향하는 갯골, 물이 차면 이 갯골을 따라 바다가 밀려온다. 그 물로 소금을 짓는다. 이 고창갯벌이 람사르 습지다. 그 습지를 채운 칠면초 군락.
메인 _ 유기봉 대표의 막내 유신 씨. 하늘이 낮으니 농사일이 한숨 놓는다. 그가 대패를 놓는다. 비 탓이다. 며칠 일을 대패를 놓고 마무리한다.
도수계_ 풍산염전 소금 맛은 소금물의 도수에 있다. 대나무 대롱으로 만든 이 작은 기구에서 맛의 비밀이 열린다.
해주와 대패 _ 염전의 보물창고가 해주다. 결정지로 끌어올려 소금이 빚어지는 마지막 경유지다. 해주 위에 대패가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대패는 소금 일구는 마법지팡이다. 결정지 판에서 대패질 몇 번이면 피어난 소금꽃이 소금더미로 쌓인다. 오지다. 
소금발/ 소금가마 _ 천일염은 그야말로 하늘과 바람이 짓는 소금, 하늘 낮으면 천하없어도 소금발이 가늘다. 하늘낮은 날 지은 풍산염전 소금발도 천하없다.
빈의자와 전경 _ 풍산염전은 보통염전처럼 저수지부터 결정지까지 일직선 염전이 아니다. 공간효율을 높여 순환하는 방식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