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0, 2012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중학교 시절, 나의 독서기(讀書記)
중학 이학년 시절에 내가 구입한 책들 중 하나다. 나는 어쩌다 돈이 생기면 평택역 앞에 있는 을지서점에 들려 책을 샀다. 을지서점의 주인은 전직 교사 출신의 대머리가 벗겨진 분이었다. 처음에는 문학책을 주로 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스탕달의 <적과 흑> 등등. 이 책은 순전히 현학 취미로 산 것이다. 제목 중 마지막 '편(片)' 자를 몰라 서점에 있는 옥편을 찾아본 기억이 난다. 저자 이름 안병욱의 '욱(煜)'자도 역시 옥편을 보고 알았다. 독서에의 몰입은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교과서 외의 독서는 이 무렵에도 꽤 이루어졌었나 보다. 이 책을 다시 살펴보니 "1969. 12. 20 Yun Jin Sup"이라고 사인이 돼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집의 책꽂이에는 큰 형이 보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 때는 중학교 입시에 매진하던 때였지만, 호기심에 형의 책을 떠들쳐 보곤 했다. 나의 현학 취미는 이런 환경에서 발동된 것 같다. 형의 책 중에 <일반사회 쇼트 코스>란 책이 있어서 보니 '게마인 샤프트'니 '게젤 샤프트'니 하는 단어들이 나왔다. 나는 뜻도 제대로 모르고 그 단어들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부흥회가 열린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갔는데, 서울에서 온 부흥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게젤 샤프트', '게마인 샤프트'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아는 단어가 나오니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졸고 있는 시골 할머니들한테 외국어라니 하고 웃음이 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이학년 무렵, 집에는 누나들이 보는 여성지들이 굴러다녔다. 아마도 '주부생활'이 아니었나 기억되는데, 돌아가신 이일 선생이 쓴 글이 거기에 실려 있었다. 이일(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라고 직함이 씌여 있었다. 파리 시절의 유학기를 쓴 것 같은데, 마지막 부분에 '그녀와 함께 나는 침대로 갔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일 선생이 돌아가신 해, 새해 인사 자리(선생은 정초면 평론가협회 회원들을 댁으로 초대했다)에서 내가 "선생님은 마지막 남은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십니다"하니까 파안대소하며 좋아했다. 그처럼 멋진 분이니까 여성잡지에 그런 연애담을 썼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지면에서 그렇게 만난 분과 훗날 사제지간의 연을 맺고 평론계의 어른으로 모시게 됐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중학교 삼학년 가을 무렵,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위한 경비를 거두었다. 그 때 돈으로 3천 4백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수학여행을 안 가고 그 돈으로 책을 샀다. 처음에는 책을 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을지서점에서 막 출간된 동화출판공사의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욕심이 났다. 붉은색 바탕에 금박의 글씨가 찍힌 호화양장본이었다. 전직교사 출신의 책방 주인도 이런 책은 꼭 읽어봐야 한다며 나의 호기심을 부추긴 것도 책을 사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카프카의 '城',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세익스피어의 희곡집,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 아쿠다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의 '하동(河童),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 등이 실린 일본소설집 등이었다. 이 책들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단,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 합본된 책만 없는데, 그것은 내가 군에 있을 때 작은 형의 여자 친구가 빌려갔다가 사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도 책은 절대 빌려줄 일이 아니다.
이 무렵, 나는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하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삼학년 가을, '장마'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써서 응모했다. 흰색 편지봉투에 2백자 원고지 60매를 접어 구겨 넣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 누런 큰 봉투는 생각도 못 했다. 편지를 부치고 나서 새해 1월 1일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결과를 보니 '신경득'이라는 분이 가작으로 당선을 했다. 5. 25를 배경으로 쓴 글인데, 국민학교 여선생의 사랑 이야기와 인공 치하 산간 마을 아이들의 일상이 버무려진 소재로 재치는 있었지만 산만한 글이었다. 훗날 보니 이 분은 어느 대학의 교수가 돼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반은 한자고 반은 한글이었다. 나는 옥편을 뒤져가며 신문을 읽었다. 안병욱 교수가 번역한 이 책 역시 그랬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는 어느 때는 한글 전용이었다가 어느 때는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梨花女子大學校'를 '배꽃계집들의 배움터'라고 쓰자고 외친 골수 한글 전용주의자였다. 반면에 인상파 풍의 화가로 유명한 오지호 선생은 국한문혼용주의자였다. 나는 몇 해 전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그런 주장을 담은 오지호 선생의 저서를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을 그 때 사지 못 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 값도 비싸지 않았는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애서가로 유명한 고(故) 민병산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책은 발견하는 즉시 사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과연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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