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0, 2012

시 한마디에 뼈와 살, 숨결로 스몄다. (말로)읽히는(노래로)불리는(일상어를)해독하는 시의 시인 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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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마디에 뼈와 살, 숨결로 스몄다. (말로)읽히는(노래로)불리는(일상어를)해독하는 시의 시인 김근



노벨문학상 그 집 앞 진, 풍경

2005년부터일 것이다. 10월이면 어김없이 우리 노 시인의 자택 앞에 진풍경이 펼쳐진다. 2005년 우리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그 노 시인은 ‘고은’ 시인이고 매년 10월은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는 시기이다. 올해, 예전만 못했지만 어김없이 그의 집 앞 풍경은 진, 했다. 물론 노벨문학상 발표와 더불어 ‘또 불발…고은, 영원한 노벨문학상 후보’ 같은 조간신문 단신 제목을 남기며, 신속 철수라는 패턴 또한 여전했다.
올 노벨문학상은 중국 작가 모옌이 수상했다.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각축을 벌였다는 후문이다. 여기 우리 시인 고은까지, 동아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이 예전과 다르다.
1968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는 일본, 작가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그리고 1994년 오에 겐자부로로 이어진다. 여기에 올해 수상자(2000년 수상자 가오싱젠은 프랑스 국적이다)를 낳은 중국. 동아시아에서 역사?문화?사회 전 부문에서 서로 경쟁하는 두 나라와 ‘어김없이 불발’ 대한민국은 어떤 차이인가.

번역,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 이가, 리쾨르다. 그의 『번역론』을 통해서다. 이 기쁨의 매개, ‘행복한 도전’인 번역의 정체는 무엇인가. 상당히 상투적이지만, 사전 한 귀퉁이를 인용한다.
“번역(飜譯)은 어떤 언어로 쓰인 글을 다른 언어로 된 상응하는 의미의 글로 전달하는 일이다. 이 때 전자의 언어를 원어 또는 출발어(source language)라 하고, 후자의 언어를 번역어 또는 도착어(target language)라고 한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원전을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인 배경지식과 옮겨오는 언어의 정확하고 문학적인 문장력이 필요하다.” 위키디피아에서 ‘번역’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다. 위키디피아로 쌓인 번역의 ‘해석’은 번역의 역사와 번역가를 지나, 번역의 조건인 ‘충실함(원문과 같도록 함)과 투명화’로 이어진다. 이쯤이면 번역 이야기를 장황하게 옮기는 까닭을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 문학의 번역, 이것이 노벨문학상과 우리 문학의 거리를 넓히거나 좁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그 사회가 쌓아온 문학(혹은 인문학)에 대한 생산과 소비의 길항(拮抗)과 함께.
노벨상에 목메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 문학의 소비 공간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보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최근에는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돼 발칸 지역에까지 소개되었다는 고무적인 풍문이 들린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 아직 우리 문학의 번역은 소소하다.
서두가 참 길다. 노벨상으로부터 번역, 우리문학의 소비 공간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의 예고편이다. <2012 해외 원어민 번역가 초청 연수 사업> 첫 번째 문학기행에 대한 예고편.

한 사람의 시인이 사라지면?

지난 ‘죽곡열린도서관’ 편 원고에서 노인 한 사람의 죽음과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노인 한 사람 자리에 한 사람의 시인을 대입시켜보자. 한 사람의 시인이 사라지면? 아무래도 한 나라의 정제된 혹은 가장 원초적인 언어와 생각의 창고를 잃는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인류역사 초기, 시인은 하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주술사였다. 하늘과 땅이 순환하는 기운 속에서 살며, 사람의 역사를 앞장서 노래로 풀어내던 예언자였다. 그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회자되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민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때 시인은 홀로 매스미디어가 되었다.
시 한편(부분이다) 읽어보자.
태를 묻지 못했으니 고향도 없다/ 몇 차례 허물을 벗었는지는 잊었다/ 허물을 벗어도 허물 안의 기억은/ 허물 바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 어느 것이 허물 바깥의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안인가 바깥인가/ 몇 차례 허물을 태우면서/ 한때 번들거렸으나 이제 푸석해진/ 한 生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삶인가 죽음인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돌 하나 붙박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돌의 고향인지는 묻지 않았다/(「뱀소년의 외출」 부분)
이 시 「뱀소년의 외출」은 《삼국유사》 의해 편 <蛇福不言사복불언>을 모티브로 한다. 이 때 사복(蛇福)은 ‘뱀아이’다. 태를 묻지 못해 고향이 없는 ‘돌’의 고향인지 묻지 않은, 그가 바로 김근 시인이다.

해외 원어민 번역가와 찾은 시인의 고향, 시인의 마을

전북 고창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시인의 고향’이고 ‘시인의 마을’이다. 서정주 시인 한사람의 중량감이 그렇게 만들었다. 시인의 고향, 고창에 한국문학번역원 관계자들과 외국 작가, 번역작가 몇이 함께 자리했다. 앞서 이야기한 <2012 해외 원어민 번역가 초청 연수 사업>의 첫 번째 문학기행 자리이다. 십여 명의 일행 가운데, 주인공은 물론 고창에 태를 묻은 40대 초반의 젊은 시인, 김근이다(‘뱀소년의 외출’과 달리 그래서 그는 고향이 있다).
시인은 중앙대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에서 지금 박사과정에 있다. 학부생들에게 시 창작론을 가르치는 ‘인기’ 강사이기도 하다. 한겨레문화센터와 같은 시민교양강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수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인이 가져야할 ‘좌표’를 일깨우는 길잡이였으니, 그 공간이 자연스레 대학으로 옮아간 것이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근 시인은, 그동안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창비)』 등을 내며 폭넓은 독자층을 만들어왔다. 2000년대 우리 문단의 젊은 시인 김민정, 유형진, 황병승, 김경주, 안현미 등과 ‘미래파’라는 그룹을 지어 좌장으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시인은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와 만나게 하는 ‘문학나눔콘서트’ 같은 작은 문학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다. 시의, 문학의 ‘퍼포밍’을 주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국문학번역원다운 참신한 시도, 특별한 문학기행

번역원이 이번 문학기행은 여러모로 의미깊은 시도이다. 해외 원어민 번역가에게 번역 텍스트(물론 시)의 행간에 스며있는 다양한 인문학적인 요소를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과 번역문 사이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로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 문학이 노벨상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해외 원어민 번역자’와 ‘우리’ 사이, 역사에서부터 문화까지 그 거리를 줄이지 못한 탓임을 다시 떠올린다(똑같은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려니, ‘한국문학 번역의 목표가 꼭 노벨상’은 아니라는 것, 이해해 주시기를).
‘김근 시인과 함께 하는 문학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일정은, 몇 가지 키워드가 제시되어 있다. 먼저 ‘시인의 고향이자 서정주 문학관이 있는 전라북도 고창을 방문하여 작가와 대담을 진행한다.’ ‘한국, 인도, 멕시코 시인들의 대표작을 선정하여 이에 대한 토론을 진행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해외 원어민 번역가들의 한정식, 한국사, 전통한옥 등의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이다.
이번 문학기행에 참가한 작가와 번역가를 보자. 초청작가로 김근 시인, 참가작가는 K. 스리라타(인도) 시인, 번역가는 레온 플라센시아 뇰(스페인어권)과 엘리 황(영어권)이다.
10월 11일부터 이틀동안 진행된 일정에서 일행은, 시인의 태생지 고창의 면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서(西)로는 동호바다로부터 동(東)으로 문수사와 조산저수지까지다. 그 횡단에는 미당시문학관, 선운산과 선운사, 고창읍성과 고인돌박물관까지 역사며 문화의 지층이 켜켜로 담겼다. 특히 서해 바다와 갯벌에서부터 시인의 고향 조산마을과 조산저수지까지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하는 것이 ‘물’이다. 이 물의 이미지는 김근 시인의 시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바다로부터 저수지, 조산마을의 우물까지,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원초적인 물의 형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공간이다.

물과 시, 노래가 닮아 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토론으로 올린 김근 시인의 시는, ‘뱀소년의 외출’ ‘헤헤 헤헤헤헤,’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물 안의 여자’ ‘焚書 3’이다. 영어로 옮겨, 함께 읽고 시안의 분분한 감각을 나누었다. ‘물 안의 집 떠다니는 방구들에 차마 눕히지 못한 물 안의 아기 물 밖으로 떠난 아비 찾아 저 혼자 떠올랐네(물 안의 여자)’ 같은 시에서도 물의 이미지를 살펴볼 수 있다.
토론자리는 밤늦도록 길었다. 시 이야기는 자연, 시를 낳은 고장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시인의 언어를 잉태한 소리와 몸짓으로 이어졌다. 고창의 농요 한 자락, 판소리 한 대목이 걸지었고, 시인의 시에 밴 가락이 어떤 연유인지 그 원천을 자연스레 이해하는 자리가 되었다. 특히 시인이 들려준 심청가의 심청 태어나는 대목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시는 노래였다는, 모두가 머리로 배운 것을 귀와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시와 노래의 친연(親緣)은 낭송에서 다시 확인한다. 김근 시인의 시는 노래다. 그가 노래로 읽는다. 사설조에 시를 얹혀 부르는 그의 시 낭송 방식은 벌써 한국문단에 이름짜하다. 이에 질세라 멕시코 작가, 레온 플라센시아 뇰이 멋진 낭송으로 화답한다. 그는 멕시코 유수의 문학잡지 편집장이기도 하다. 그가 그의 잡지에 김근 시인의 시를 싣겠다고 제안해, 조만간 멕시코에 우리 시가 소개될 예정이다.

시인의 고향, 마을은 여전히 이야기를 품고 있다

문학기행 일정가운데 일행의 이목을 끈 공간은 당연히 시인의 고향마을이다. 고스란한 옛정취가 가득한 시인의 마을은 이제 없다. 고창-담양간 고속도로가 그의 고향 집 위를 지나가고 있다. “언젠가 광주에서 문학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그 자리를 밟고 지나는데, 울컥 치미는 것이 있어, 어찌나 힘들었던지.” 그의 집과 이웃집은 고속도로에 묻혔지만 아직 그의 고향마을은 통째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을 앞 조산저수지도 그대로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일가 어른들도 세월이 내린 머리와 주름을 빼곤 그대로다. 말투며, 몸짓이며, 마음씀슴이며가.
시인의 고향은, 고향 그대로다. 고속도로에 묻힌 고향집은 사라졌지만, 산과 물과 바다가 오롯하다. 그의 시에 도톰한 살을 입혀주었던 이야기가 마을 어귀마다 생생하다.

번역,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

다시 번역 이야기다. 게다가 시의 번역 이야기다. 러시아 출신 언어학자 로만 야곱슨은 ‘정확히 말하면 시는 번역 불가하다’라고 결론을 짓기도 했다. 그만치 시의 번역이 어렵다는 것일 테지. 그 시가 담고 있는 형식과 내용 모두를 새로운 언어의 형식과 내용으로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쫌’ 한다 하는 독자라면 다음 구절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글로 읽는 ‘시’도 어려운데, 영어라니. 지레 혀를 차고 읽기를 저어하지 마시기를.

I have no homeland since I could not bury my amniotic sac/ I forgot how many times I shed my skin/ Even after shedding my skin the memory inside skin/ does not disappear outside the skin/ It is hard to tell/ Which is the memory/ inside the skin/ Which is the memory outside the skin/ Am I inside or outside/ Having burnt my shed skin a few times/ Smelling a life that once was glossy/ but now crumbling/ Am I life or death/ Earth or heaven/ A pebble was stuck in the ground without a stir/ I did not ask if that was his homeland/

문학기행에 함께한 번역작가 랠리 황이 영어로 옮긴 「뱀소년의 외출」일부이다(앞서 인용한 시의 영문이다). 글의 시작에서 인용한 『번역론』에서 리쾨르는, 번역 행위란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뱀소년의 외출」한글본과 영문본 사이에서 결국 쓴 잔을 마시고 ‘무릅쓴 배신’에 빠졌는지, 아니면 기쁘게도 ‘언어적 환대’를 받았는지. 이도저도 아니어서, 우리는 ‘시’ 자체를 읽을 줄 아는지. 그리하여 우리의 ‘뱀소년’이 제 꼬리를 물고 우로보스, 쉼 없이 제자리를 찾아 영원회귀하는.(번역원의 정진권 팀장, 백지수, 신수경 님과 통역 김지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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