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예술과 지성 ‘감각하는 사유’전



강릉미술관 기획. 초대
예술과 지성 ‘감각하는 사유’전
‘감각하는 사유’는 이 여름이라는 계절과 닮아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땅만 가지고 살 수 없고, 땅과 더불어 공기와 물과 태양과 어둠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공기와 물은 각각 다름이지만, 생명인 나무에게는 그들이 같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사유는 감성과 이성이라는 분류법으로 했을 때는 각기 다른 영역이고, 합일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존재, 몸에 있어서는 동시적으로 기능하는 것, 작용하는 것, 상보하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그 작품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감각하는 사유는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는 이 대지 위에 어떤 사물, 사건들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으로 작품의 시작점을 찾아야하는 것이라면, 그 시작점은 우연적인 사건들, 일시적인 작용들, 순간적인 나타남을 통한 접촉점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작의 순간은 그 사건을 논리적, 이성적으로 인지 이전의 어떤 충격, 강도 높은 접점일 수 있을 때 발생합니다. 사건의 수용의 측면에서 감각은 이성에 우선되는 것이지만 그 감각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것에는 사유의 측면들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을 열기 위해서는 실상은 늘 지배하고 있는 감각을 해체시켜야 되는 건데 그 지배하는 감각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논리적인 부분들, 혹은 우리가 그런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들 시선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틀은 우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습관적인 어떤 도구들 감성적 감각들을 해체시킴으로써 우리가 진정하게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감각으로 열어갈 수 있는 방식이라고 보여 지는,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이성적인 문제가 아닌 어쩌면 몸으로 할 수 있는 해체주의적인 시선이나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문제도 신체를 다루고 있고 몸의 어떤 감각과 신체 이성적인 것들이 분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  라고 하는 ‘메를로 퐁티’적인 시선들이나 이런 것들과 다르지 않은 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하지 않으면 세계 내 존재, 구조, 앞으로의 지평을 바라 볼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상부는 어떤 것을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만드는 도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수용자- 관객의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작품은 눈앞에 있는 것. 그 이상과 이하도 아닌 작품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적인 수용태도를 말 합니다. 인지한 정보 없이 작품의 언어와 관객의 만남이 이루어져, 앎의 방식, 사유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 만남은 소통이라는 창을 만들어 다음의 세계로, 내면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각하는 사유는 그러므로 몸의 담론 안으로 들어가 사유의 시스템에 대하여 여러 작가들과 대화하기를, 소통하기를 원합니다. 소통은 작품의 완결되는 의미에서 중요한 결말이고, 동시에 작품을 떠받치는 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하는 사유’전은 현재의 지평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더 넓은 의미에서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중요한 전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전시를 강릉미술관에서 개최하게 된 점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됩니다.
2012. 8. 9  강릉미술관 관장  한 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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