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4, 2012

이보람,Lee Boram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 이보람의 청각적 메타포와 회화미학
김종길 | 미술평론가
더미를 태우는 불꽃
매일 아침,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미학이 불타고 피 묻은 철학의 거죽이 내 걸린 세계의 뉴스를 들으며 잔혹한 인간의 폭력에 절망한다. 세계는 인간이 모든 생명과 문명과 역사를 파괴하고 살육하는 거대한 도살장. 그 안에서 목숨을 찢는 피의 목청이 벽을 뚫는다. 시원의 도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서, 티베트의 라싸에서 그리고 도시난민이 불타는 서울의 용산에서 ‘최저 낙원’을 향한 인간의 꿈은 곤두박질쳤다.
이제 우리는 잔혹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맞불을 놓는 방식으로 칼을 들어 사악한 인간의 중심을 내쳐야 할지 모른다. 세계평화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서슴지 않는, 자기부정의 모순에 빠진 인간의 희망은 더 이상 평화의 중심으로 치닫지 못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유하리라는 따위의 상상조차도 자본 가치로 환원해 버리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예술론은 더욱 절망적이다.

▲Crying 3, 2012, Oil and acrylic on canvas, 73 x 61 cm.jpg

그러나 1952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아니, 다시 6?25 한국전쟁의 검은 아수라(阿修羅)가 휘몰아 칠 때, 사무엘 베케트는 존재의 절망과 불안을 ‘고도(Godot)’의 불꽃으로 피워 올렸듯이 우리는 아직 비관에 이를 수 없다. 문명화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폭력을 내부로 흡수해 들이면서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하는 예술은 미래지향적이며, 예술을 통해 우리는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순예의 예지적 전망은 숭고하다. 그 소리는 우리 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또한, 문학은 황폐의 공간이며 그런 공간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던 모리스 블랑쇼는 희망이 사라진 ‘절대적’ 밑바닥에서 진리와 인간의 미래를 긍정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에 대해 “근대성이 쌓아올렸던 거대한 이념 더미를 태우는 불꽃을, 그리고 이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주었으며, 이 잿더미 가운데서 근대성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죽음의 미사를 집전하고 근대성의 조종을 울린 사제(司祭)”라 말하며 탈근대 철학자라 치켜세우는 데는, 그런 ‘황폐함’의 절대적 공간에 대한 사유가 존재한다.
베케트의 ‘고도’에는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러하듯 포조의 실명과 두 주인공의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허무와 비극의 세계인식이 떠돈다. 부조리한 삶에 깃든 블라디미르의 실존적 독백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는 비극적 세계의 내부 묘사에 다름 아니다.
이보람의 회화를 읽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의 현실을 깊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들끓게 하고 누군가는 들끓는 현실과 싸우고 또 누군가는 들끓게 하는 그 누군가에게로 총을 들고 달려드는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보람의 회화가 그런 모순의 세계를 재현하거나 증언하기 위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곤두박질하는 인간의 꿈에 대해 사유하면서 예술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아직 비관에 이를 수 없다면 문명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예지적 전망은 무엇이며, 희망의 잿더미에서 피워 올릴 수 있는 불꽃의 씨알은 무엇인지 묻는다. 나는 핑크빛이 도는 그의 회화가 그 씨알들의 희미한 불꽃이라 생각하며,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희미한 회화적 질감들조차도 그렇게 느낀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허구적 상상력이 아니라 현대사의 구체적인 사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그 사건들이 전하는 언론 속의 이미지와 소리, 문자언어를 사유함으로써 사무엘 베케트나 모리스 블랑쇼, 주제 사마라구가 보여주었던 예술적 상상력과 만나고, 그 상상력의 회화적 실체로서 세계를 향한 상징적 메타포를 크게 타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희미한 잔상과 상징투쟁의 미학
구체적 사건들의 이미지 또는 문자들로 화면을 구성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건의 실체와 맞닿지 않고 문자는 언론처럼 그 진실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다. 그는 원본의 이미지가 획득하고 발산했던 강력한 미디어적 속성을 제거한 채(휘발시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마치 희미한 잔상들처럼 화면에 등장시킨다. 단색 톤으로 바꾸고 채도를 내린 인물 이미지들은 가까이 가서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다. 멀리서 알아 볼 수 없으니 작품의 시각언어가 쉽게 청각언어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시각과 청각이 충돌하면서 보고 듣고를 구분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안개에 물려서 희뿌연 한 덩어리들로 희미했던 것들이, 안개가 걷히면서 투명하게 팽창하는 공기와 그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물들이 쟁쟁거리던 그 느낌들과 다르지 않다. 신문이나 포스터가 갖추고 있는 사진이미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적 시각언어와는 정반대의 모순어법이다. 그의 작품들이 신문의 사진이미지를 일부 차용해서 제작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어떤 이미지를 차용하되 부분들의 세부를 나누어 몽타주하듯 배치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화면 전체로 ‘전면화’ 시킨 것이기도 하고, 전체의 일부분만을 이용해 그 부분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시각언어를 ‘극대화’ 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면화와 극대화의 화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희미한 시각성’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나는 위에서 베케트와 사마라구의 작품이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허무와 비극의 세계인식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의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라는 독백을 통해 드러났다. 베케트의 ‘고도’는 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사마라구의 세계는 눈먼 자들의 세계였다. 그래서 오히려 ‘외침’의 소리가 컸다. 이보람의 희미한 시각성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들의 기다림이라면, 청각성은 블라디미르의 독백으로 울린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듯이, 그는 비극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듯 시각성을 희미하게 두되 오히려 전면화?극대화시킴으로써 이미지의 청각성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그것은 회화적 메타포의 크기와 비례한다.
회화적 시각성은 눈앞의 현실이요 실체라면, 회화적 청각성은 은유요 상징이다. 실체로서의 회화가 나의 눈앞에서 전경으로 펼쳐져 있다면, 상징으로서의 회화는 보이지 않는 나의 눈 뒤에서 후경으로 열려져있다. 전경은 감성의 단순한 요소, 즉 형태와 색채에 관련한다. 후경은 보다 깊고, 보다 심오한 요소에 집중한다. 우리가 이보람의 회화적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경을 살펴야 한다.
후경은 한 마디로 깊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초상화의 전경 배후에서 나타나는 것을 더 가까이 관찰하려고 하면, 우선 첫 번째 층에서는 그려진 인물의 순순히 외적인 측면, 즉 물적인 것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서 회화의 이차원성에 대립하는 삼차원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후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인데, 비로소 생동감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이 생동감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다시 심리적인 존재,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생명체에서 얼굴표정, 전체적 형상, 거동, 태도 등에 의해 만나게 되는 내면적인 것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서 얼굴표정 속에 감춰진, 예컨대 렘브란트가 그의 초상화에서 깊이 있게 표현해낼 줄 알았던 인간의 운명 같은 것이 드러난다. 이 운명성 역시 가장 최후의 층은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야만 우리들 모두에게 적합한 보편적 인간성이 두드러질 수 있다. 그리고 최후의 그곳에서 우리는 작품에 투영된 예술가의 정신과 만나게 된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청각의 메타포는 상징투쟁의 미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외침으로 가득하며 그 외침의 언어를 통해 허무와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물의 초상에 종교적 상징성까지 부가함으로써 그의 작품을 숭고의 어떤 상태로 상승시키고 있다. 
희생, 인간의 피에타
(2011. 이하 )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은 몇 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말로 희생자에 속하는 ‘Victim’은 피해의 의미가 크고 제물, 희생물의 의미가 더해진다. 희생(犧牲)의 본뜻도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祭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희생자가 단순히 어떤 사고의 피해자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흔한 범죄와 질병이라기보다는 인류가 처한 위험한 묵시록적 상황들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그것은 인류가 문명을 탄생시킨 이래 단 한순간도 멈춰본 적이 없는 전쟁에 관한 것이다.
선과 악, 신과 악마의 전쟁 같은 신화적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하며 인간이 인간을 살육했던 인간의 전쟁을 일컫는다. 돌도끼에서 창으로 칼로 활로 총으로 포탄으로 핵으로 싸우고 죽였으나 이제 인류는 디지털 게임을 하듯 작전을 펼치고, 전운이 돌지 않는 곳에서 참혹의 세례를 퍼붓는다. 문명이 빠른 자들의 전쟁은 피의 목청이 뚫지 못하는 게임방 같은 시설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어가며 단추를 누르지만, 문명이 더딘 자들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느라 무섭고 또한 참혹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Lamentation’이다. 이 말의 용도와 뜻이 끝없다. 애통, 한탄, 통탄, 비탄, 통곡, 탄식, 애도의 뜻이니 ‘탄(嘆)’의 의미가 크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통곡의 (1304~1306)을 제작하기도 했다. 피에타와 달리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의 몸짓을 그야말로 인간의 감정으로 그려 넣어 생동감을 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에서는 ‘라멘타찌오lamentazione’가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弔歌), 비가(悲歌)를 가리키기도 한다.
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인물의 반신상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한 뒤 푸른빛이 도는 단색조로 그렸고, 그 둘레에 손가락과 건축물의 잔해, 검은 연기, 그리고 눈알들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파괴된 잔해와 검은 연기들 속에서 전쟁의 공포를 상상하게 되고, 무수한 손가락들에서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참혹을 후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이 세계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화면을 배회하는 눈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눈물의 현실을 볼 수밖에 없는 비극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의 손이고 눈이지만,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통곡의 외침일 것이다. 
(2012)은 의 회화적 차원(dimension)을 더 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두상, 반신상, 전신상으로 나뉘어 부분과 전체가 몽타주 되듯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고, 그 사이로 총열처럼 쌓아 놓은 손가락들과 총알들이 난무하고 있다. 인물들은 모두 통곡의 순간들에 직면하고 있으며, 손으로 입과 얼굴을 감싸 쥔 채 오열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여기에도 네 개의 눈알이 떠돈다. 열 개의 눈이 화면 밖과 화면 속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던 과 달리 의 눈은 화면 밖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정면으로. 그리고 화면 상단 두 곳에 거칠게 회칠하듯 붉은 색을 발랐는데, 거친 색의 육질이 그동안 ‘희미한 시각성’을 유지했던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피의 목청이 시각적으로도 어딘가에 도달하려는 듯한 의지들로 읽히는 것이다.

    
▲Lamentation For Lamentation 1, 2012, Oil and acrylic on canvas, 163 x 130 cm.jpg
그러한 의지는 올해 제작된 (이하 ) 연작들에서 기념비적으로 등장한다. 작품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붉은 색의 육질로 정교하게 세워놓은 신전(혹은 제단)과 그 내부를 회오리치는 문자언어의 띠지가 있을 뿐이다. 그는 문자언어의 단어들로 청각언어를 극대화하는 모험을 감수했다. 오열하는 인물, 통곡하는 인물, 비탄에 찬 인물들의 표정이나 그것의 심리적이며 상징적인 메타포에 기댔던 것들이 이 작품에서는 그 오열과 통곡과 비탄의 소리들을 문자언어로 직접 제시함으로써 청각적 상상을 가능케 하고 있단 이야기다. 을 보자. 이 작품에는 이런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수니파성 하젬알자이디? / %의% 20일이이라크크 / 집으으로 시시 바바그그다드 크크 / 로 돌돌아아아 신신 드드드의의사사드르 / 오오자자자 / 신# / 이이 르시시티티에에 있는는 / !!!!!?라!! / 는 /이라 / 한한한!!!!!!? 이라크크크여여여 오오오열 하 / 바다그드바다그그????다??!!?%다드 / 로로로이 터터 / 있있있 다다 / 뉴 뉴시스스스
문장이 되지 못하는 이 말들의 언어는 전파가 고르지 못한 라디오를 연상시키면서, 급하게 타전되는 말들의 급진성을 내장한다. 예컨대 “수니파 성직자 하젬알자이디”라는 말이 들리고, “20일 이라크”, “집으로”, “시 바그다드”, “돌아, 신, 드의 의사 사드르”, “이라크여 오열하라”, “바그다드”, “로이터”, “뉴시스”와 같은 말들 또한 들리지 않는가! 의 문자들은 더 급하고 잔혹하다.
바그다드로이터 25일일 / 뉴뉴시시시이 라발발생 / 스스 크크 한한자 / 절절 바바그그다다드드에에에서서서!자살! / 절규 / 이이라라크 / 테테 여여성!!? / 절절규!규 / 규규 차차량량폭폭탄탄러러로 성이이 자자폭 하하고 / 로로 / 남남 부 상상 소소식을을 전해 / !테테러러!! / 해듣##!고고! / 있다다 이날날바 사망 / 편편이이 한한 / 알알만만지지구구 / 했했다다 / 수수르르 에서서 / (…)
25일 바그다드 로이터 통신에 따른 기사가 주 내용인 듯하다. 이 국제뉴스를 국내로 타전하는 것은 뉴시스다. 단어들만 뽑아 올리면, “바그다드에서 자살”, “절규”, “차량 폭탄 테러로 여성이 자폭하고”, “남부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듣고”, “테러”, “민간이 1명이 사망하고”, “바그다드의 수르에서”와 같은 말들이다. 띠지는 모르스 부호가 타전될 때의 단타음을 상기시킨다.



자, 그렇다면 이 소리들이 타전되는 곳은 어디일까? 아군? 적군? 아니다. 바로 우리다. 이보람은 인터넷을 도배해 놓은 세계의 사건들이 오히려 타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리는 무관심에 문제를 제기하듯, 회화적 청각성을 미학적 전략으로 전치시킴으로써 비극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타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Lamentation’이 조토의 의 그것처럼 인간의 희생에 대한 미학적 피에타로서의 상징이라면, 는 수없이 죽어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조가(弔歌)이자 비가(悲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숭고한 음악들처럼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를 노래하는 듯하다.


이보람(Lee Boram)

1980 전주 출생 / 한국
2004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학사 졸업, 서울 / 한국
2008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석사 졸업, 서울 / 한국
레지던시
2009 Neo-Prime 레지던지 프로그램 1기 입주 작가, 프라임 문화재단, 서울 / 한국
개인전
2012  애도에의 애도, 마이클 슐츠 갤러리 , 서울 / 한국
2011 CUT OUT, 송은 갤러리, 서울 / 한국
2009 Bleeding Pink, 아트 스페이스 H, 서울 / 한국
2007 무기력한 조합, 예술공간 HUT, 서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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